연혁
부산지역에서는 구석기․신석기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고 있지만, 오늘날의 연제지역에서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연제지역의 청동기시대 유적․유물로는 거제동․사직동․양정동 등의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연제지역은 청동기시대부터 사람들의 생활이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동래지역에서 발견된 쇠를 제련하는 야철터는 이 지방이 선사시대 철생산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야철을 채집하여 제련한 철은 멀리 낙랑․대방까지 수출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연제지역에도 상당히 발달한 철기문화가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삼한 및 삼국시대의 연제지역은 연산동에 배산의 고성지(古城址)는 거칠산국의 유적으로 보이며,『삼국사기』권34, 지리지에 의하면, “동래군은 본래 거칠산국 이었는데 경덕왕 때 동래군으로 고쳐 지금도 이를 따르고 있다. 영현이 둘이다”라고 하고 있다. 또『신중동국여지승람(1530)』권23, 동래현조에 의하면, “옛 장산국이다(혹은 내산국) 신라가 점유하고는 거칠산군을 두었는데,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고 하였다.
한편,『삼국지』위지 동이전 변진전에는 삼한시대 24개의 국명 중에 ‘독로국’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동래라는 설도 있다. 동래지역의 옛 명칭은 거칠산국․장산국․내산국 등으로 달리 불리어졌음을 알 수 있다. 연산동고분군에서는 토기류와 철제류 등이 다량출토는 당시 이 지역이 신라영역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고려사』권57, 지리2 동래현조에 보면, “현종 9(1018)에 본주(울주)에 소속시켰으며 후에 현령을 두었다. 이 현에는 온천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동래는 고려 초기에 와서 군에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속현으로 강등되었다. 고려후기에는 남해안지역에는 왜구의 침략을 방비하기 위해 경상도도순문사 박위에 의해 동래읍성이 개축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6년(1397) 군사상의 요충지로 동래에 진을 설치하여 병마사가 동래현의 판현사를 겸임하였으며, 세종 5년(1423)에는 병마사를 첨절제사로 개칭하였다. 세종 22년(1440) 진을 속현인 동평현으로 옮겼다가 다시 환진하였다. 그후 명종 2년(1547)에는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선조 25년(1592)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연제지역의 행정구역 변화는『동래부지(1740)』에 의하면 7개면 82리 19동의 체제로 행정구역이 나누어져 있다. 이때 연제지역은 서면의 거벌리․대조리가, 읍내면의 안락리․율부리로 편제되어 있었다.『경상도동래군가호안(1904)』에는 12면 154동리로 서상면의 거벌리․거평리․대평리와 읍내면의 안락리․율부리에 속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 부산부가 설치되자 동래는 부산부의 지배를 받았으나, 1914년 동래부를 부산부와 동래부 일부와 기장군을 합하여 동래군으로 분리되었다. 이때는 동래군 서면의 거제리․연산리에 속했다. 1936년에는 서면과 암남리, 1942년에는 동래읍의 전부와 사하면 등의 지역이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49년 8월 부산부가 부산시로 개칭되고, 1957년 1월부터 구제의 실시로 동래구에 편제되었다. 1995년 3월에는 연산동과 거제동이 연제구로 분구되었고, 그 관할 동은 거제동․연산동 등이 있다.
거제동
오늘날의 거제동(巨堤洞)은 조선시대 서면에 속하며 동리명은 거벌리라 하였다.『동래부지(1740)』에는 “거벌리가 동래부에서 5리 떨어져 있다”라 하였으며,『동래부읍지(1832)』에는 동래부에서 6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거벌(居伐)은 거벌(巨伐)로도 표기되어 큰벌을 뜻하는 원야(原野)를 의미한다. 이 원야는 오늘날 거제동과 연산동일대에 펼쳐있는 넓은 들을 말하는 것으로 이 지역이 바로 거벌리였다. 한편, 거제리에 있었던 옛 전차정류소 지역과 그 인근을 “홰바지”라 불렀다. 홰바지는 해받이라고 불리는데 ‘동래부에서 부산으로 나들이 갔다가 돌아오면 하루해가 걸리는 지점이라는 설과 옛날 부산에는 5일마다 열리는 부산장(현 부산진시장)은 4일과 9일에 열리는데 매우 성시를 이루어 영남에서는 대구장 다음으로 가는 큰 장시(場市)였다. 동래에서 부산장에 가 물품을 매매하고 나면 해가 지므로 동래나 그 인근 촌락에 사는 사람들은 짐을 싸 짊어지고 집으로 돌라오는데 모두 보행(步行)이어서 가족들이 횃불을 들고 이곳까지 마중을 나왔다고 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였다는 설이 있다. 그 거벌리에 일제시대 범어천․온천천․서천 등의 이름을 가지면서 동래로 흘러내려 오는 온천천에 큰 제방을 쌓아 온천천을 수영천과 합류케 했다. 그렇게 온천천에 큰 제방을 쌓고 난 뒤부터 거제리란 이름이 생겨났다. 광무 3년(1899)에는 대조리는 대제리로, 거벌리는 거평리로 개칭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대제리와 거평리의 “거”와 “제”를 합하여 거제리(巨堤里)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거제동은 1957년 구제 실시로 동래구에 편입되었다가 1970년 7월 시조례에 의해 거제1,2,3동으로 분동되었다. 1979년 인구의 급증함에 따라 시조례로 거제3동을 거제3,4동으로 분동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대조리, 거벌리, 대조리, 남문구마을이 있었다.
연산동
연산동(蓮山洞)이란 지명은 낮은 늪지대로 수련이 많고 배산과 황령산쪽은 산지로 되어 연산이란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과, 이 동네의 시발은 금련산(金蓮山)이어서 "연산(蓮山)"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연산동 고분군의 유적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이 지역에 사람이 살고 있었음이 입증되며 배산성지 또한 삼한시대 성축으로 추측되고 있다. 지금의 연산동과 거제동의 낮은 지대는 지난날 저습지로 연(蓮)이 자생했다. 그래서 연이 많아 연산리라 했다는 말이 있지만 실은 그게 아니다. 옛날은 연이 자생하는 저습지에서는 사람이 살기 마땅찮고 금련산 아래 산기슭에 사람이 살 수 있는 텃자리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니 연산동의 이름은 금련산의 산 이름에서 유래한 동명이 배산의 서북쪽으로 그리고 연꽃이 피는 거제동의 얼안 이었던 늪지대로 퍼져간 것이다. 연산동에는 토곡·안락·후리(後里)·골리(谷里)·대리(大里)·신리(新里)· 전리(田里)마을 등의 자연마을이 있었으나 그 흔적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변모 발전하였다. 1914년 동래군 읍내면 지역에 속했다가 1942년 10월 부산부 동래출장소 연산리가 되었다. 1946년 연산1동을 연산1,2동으로 분동, 1966년 1월 연산2동을 연산2,3동으로 분동, 1970년 7월 연산2동에서 연산4동이 분동, 1975년 10월 연산2동에서 연산5동이, 1979년 8월 연산3동에서 연산6동이 연산4동에서 연산7동이 분동되었다. 1982년 9월 연산1동에서 연산8동이 1985년 12월 연산8동에서 연산9동으로 분동되었다. 현재는 연산6,7동이 통합하여 연산6동이 되었다. 현재는 연산1,2,3,4,5,6,8,9동에 이르고 있다. 부산지역 단일 동으로서는 가장 큰 규모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