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혁
북구지역은 옛부터 물산의 중심 집결지였다. 최근의 해운대 청사포와 신시가지 개발지역에서 구석기 유물이 채집되었다. 또한 북구지역에서는 금곡동 율리 조개무지에서는 많은 토기와 석기 등 신석기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구포 말등고개 조개무지 등에서 발견된 마제돌도끼 등의 출토유물로 보아 청동기 문화가 상당히 발달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화명동고분군은 철기시대의 고분문화가 이 지역에서는 일찍부터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한 및 삼국시대 초 북구지역은 거칠산국의 영역 하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삼국사기』권34, 지리지에 의하면, “동래군은 본래 거칠산국(居漆山國)이었는데 경덕왕 때 동래군으로 고쳐 지금도 이를 따르고 있다. 영현이 둘이다”라고 하고 있다. 북구지역도 거칠산국영역에 속해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고려사』권57, 지리2 울주조에 보면, “속현이 둘이 있는데, 동래현과 헌양현이다”라고 있다. 그리고『고려사』권57, 지리2 동래현조에는 “현종 9년에 본주(울주)에 소속시켰으며 후에 현령을 두었다. 이 현에는 온천이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초기에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속현으로 강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후기 만덕사란 사찰에 대한 기록을 보면,『고려사절요』에 “충혜왕의 서자 석기의 머리를 깎아 만덕사에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나,『고려사』공민왕 5년 6월조에는 서자 석기를 받들어 왕으로 추대를 도모하여 관련자를 참하고 석기를 외방으로 추방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한편, 조선후기 복구의 행정구역을 살펴보면,『동래부지(1740)』에 의하면, 7개면(읍내면․동면․남촌면․동평면․사천면․서면․북면)82리 19동 체제로 행정구역이 나누어져 있는데, 당시 북구지역은 동래부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은 것 같다. 반면『양산군지(1899)』에는 감동진 즉 구포에는 남창이 설치되어 조세운송의 중요기지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산지역의 행정적 지배를 받았다고 한다. 경부철도가 개통되기 이전 물자의 집산 교역지였고, 특히 포목․석유․소금․젓갈․명태 등을 바닷배에 싣거나 아니면 육로를 통해서 이를 내륙의 왜관․안동․상주지역까지 교역하였다.
한말(1896~1904)에는 양산군 소속의 좌의면(左耳面) 구포리로 행정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1904년말부터는 동래부 계서면 구포리로 기록되어 있다. 1906년에는 동래부 좌이면 구포리, 1910년에는 조선총독부의 지방관제에 의해 구포는 부산부로 편입되었다. 1914년에는 다시 동래군의 소속으로, 면의 명칭도 좌이면에서 구포면으로 변화되었다. 그후 1943년에는 면에서 읍으로 승격되면서 구포읍에는 구포리․덕천리․만덕리․화명리․금곡리․금성리가 소속되었다. 1963년에는 부산진구의 구포출장소와 사상출장소에 속하였다.
1975년 부산진구의 구포 및 사상출장소를 통합하여 시직할 북부출장소로 개칭되었고,. 1978년 북구로 승격되었다. 김해군 대저읍, 가락면, 명지면 일부가 북구에 편입되었다. 1987년 강서지역은 시직할 강서출장소로 분리되었고, 1995년 3월 1일 사상구와 분리되었다. 현재의 관할동은 구포동․금곡동․화명동․덕천동․만덕동 등이 있다.
구포동
구포동(龜浦洞)의 옛 지명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구(龜)를 갑우 또는 거뵈로 보아 "거뵈개"라는 설과 구(龜)를 검(神)으로 해석하여 "굿개"라는 설이 있다. 또한 정인보는 가야란 반도의 가운데를 흐르는 낙동강에 붙여진 강물 이름을 의용한 것이라고 한다. 이 물줄기는 반도의 동서(東西) 중간을 뚫고 흘러내리므로 "갑우내"라고 부르던 것이 "갑우"는 곧 정중의 뜻으로 지금의 "가운"의 원래 말이며 가야는 곧 갑우네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지금의 산천 이름으로는 아직 옛날 호칭을 그대로 갖추고 있는 것이 있는데, 김해의 구지봉이 "거뵈티"이고 "거뵈"가 곧 "가뵈"이다. 강물이 바다로 들어가는 어귀가 구포인데, 구포는 "거뵈개"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구포를 굿개로 보는 견해는 고대의 제사인 굿을 하는 나루란 뜻이다. 굿은 원시신앙 또는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에서 중심세력이 있었던 지역의 중심행사의 하나이다. 따라서 구포는 굿개이니 옛날 제사가 행해지던 장소의 하나로 상정될 수 있다. 또한『양산군지(1899)』에 나와 있는 구포에 관한 기록을 보면, "감동진 일명 구포라고 하여 구포를 감동나루"라고 불러 왔음을 알 수 있는데, 감동(甘東)이란 신의 뜻이므로 구포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구포는 동래부, 양산군, 동래군 그리고 부산부 등으로 행정영역이 이속되는 현상이 심하였다.『동래부지(1740)』에 서면과 사천면에는 구포의 지명이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동래부의 영역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한말(1896∼1904년)에는 양산군 좌이면에 구포리라는 행정명이 기록되어 있다. 1904년말부터는 동래부 계서면 구포리로 되었다가, 1906년에는 동래부 좌이면 구포리로, 1910년에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14년 부산부가 부산부와 동래군으로 조정되면서 동래군 구포면 구포리가 되었다. 1943년 구포면이 구포읍으로 승격되었고, 1963년 정부 직할시 승격과 함께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부산진구 구포출장소 구포동이 되었다. 이후 인구의 증가로 1979년 구포1,2동으로 분동되고, 1994년 구포3동이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구남마을, 구명마을, 구포리마을, 대리마을이 있었다.
금곡동
금곡동(金谷洞)의 금곡(金谷)이라는 이름은 금정산에 골이 있다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금곡이라는 뜻은 흔히 "쇠실"로 풀이하는데, 이 같은 마을 이름이 붙은 것은 전국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한편, 금곡동의 금은 고어에서 "쇠"로 발음되는데, 쇠의 뜻인 동(東)·백(白)·신(新)이 될 수 있다. 금정산에서 떠오르는 해를 따라 금곡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할 수 있으나, 금곡동 율리에 신석기시대 이래의 유적이나 당산·성혈 등이 있는 점을 보면 금곡동의 금(金)을 검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금곡동 율리의 주민 가운데에는 이 마을에 옛날 밤나무가 많이 있어서 율리라고 불렀다는 말이 있기는 하나 신의 뜻에서 온 마을 이름이 더욱 확실하다. 이렇게 본다면 금곡이나 율리는 말은 다르나 같은 뜻이 될 수도 있다. 고로(古老)들의 구전에 의하면, 예부터 금정산의 서쪽 골짜기에 금(金)이 나오는 곳이 많으며 삼박골 등 곳곳에는 금맥을 찾아 뚫어놓은 굴이 많이 있다고 한다. 이렇게 금이 많이 나오는 골짜기라 해서 금곡동이라 했다고 한다. 1936년까지는 금곡동이 자연마을의 행태로 구포리와 같은 행정구역에 소속되어 있었다. 1937년 편찬된『동래군지지』에 구포면 금곡리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1943년 구포면이 구포읍으로 승격되었고, 1963년 부산시가 직할시 승격과 함께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부산진구 구포출장소 금곡동이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공창마을, 동원마을, 율리마을, 화정마을이 있었다.
덕천동
덕천동(德川洞)은 원래 속등 또는 숙등(淑嶝)마을과 남산정(南山亭)·의성(義城)·기찰(譏察)마을 등 4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었다. 일반적으로 넓은 의미에서 구포에 포함된 지역으로 불리어지기도 했으나, 마을 이름은 꽤나 오래전부터 있었다. 이 마을은 문헌상에 덕곡촌(德谷村) 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또한 낙동강변의 덕천천(德川川) 하구에 자리잡은 덕천동은 한 동안 구법곡(仇法谷)이라고도 불렀으며, 감동포(甘洞浦) 또는 감동진(甘洞津)이라고도 하여 구포에 포함시켜 불리기도 하였다. 덕곡천이라는 마을 이름은 적어도 고려시대 이전부터 불려진 이름이며 아마도 만덕사와 관계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덕천동은 만덕사로 올라가는 입구에 위치한 마을이다. 그리고 숙등·남산정·의성 등의 마을은 임진왜란(1592)이 일어난 이후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숙등(어떤 지도에는 속등이라 기재)은 수정(戍亭)에서 나온 이름이 와전되었을 것이며, 남산정(南山亭) 역시 구포왜성이나 금정산성과 관련된 이름일 것이다. 의성마을도 구포왜성을 의성이라고 부른데서 연유된 이름으로 보인다. 덕천동은 새로운 주택지로 변모하면서 아파트 신축과 인구가 급증하여 1983년 덕천1,2동으로 분동되고, 1992년 덕천3동이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기찰마을, 남산정마을, 부산의용촌, 숙등마을, 의성마을이 있었다.
만덕동
만덕동(萬德洞)에 대한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에 금정산 기슭인 이곳에 1만여의 피난민이 피난와서 모두 화를 면했었는데, 이에 따라 1만여명이 덕을 입었다고 하여 이 마을 이름이 만덕동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만덕동에는 예부터 기비현(其比峴) = 사비현(射比峴)이라는 큰 고개가 있었다. 낙동강연안에서 동래로 통하는 이 고개는 동래지역과 서부경남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고개로서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였으나 길이 워낙 높고 험하고 숲도 많이 우거진 곳이었다. 이에 따라 이곳은 장꾼들을 노리는 도적떼가 자주 출몰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동래부 관내에서 도둑이 심하기로는 만덕고개가 으뜸이고, 다음은 모너머고개(송상현공 동상이 있는 고개)였다고 하며 당시의 사람들은 혼자 만덕고개를 넘는 것을 겁내었다고 한다. 전하여 오는 말로는 만 사람이 떼를 지어 고개를 넘어가야 온전하기 때문에 "만등고개"라고 하였다 한다. 이 만등에서 만덕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고려사』에는 충혜왕의 서자 석기(釋器)의 머리를 깎아 만덕사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만덕사는 만덕동에 지금 남아 있는 사지를 그 만덕사 텃자리로 본다. 그 만덕사로 인해 만덕고개란 이름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만덕동은 신도시로 인구의 급증으로 1989년 만덕1,2동으로 분동되고, 1990년 만덕3동이 분동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만덕마을, 사기마을, 상리마을, 중리마을, 하리마을이 있었다.
화명동
화명동(華明洞)은 검얼뫼 또는 새얼뫼라고 해석되는 금정산을 배경으로 유유히 흘러가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산계곡에서 강변에 이르는 일대에 자리잡고 있는 오랜 역사를 이어온 고장이다. 화명천(華明川)은 일명 대천천이라고 부르며, 하류에 위치한 대천마을의 이름도 이 시내에서 따온 것이다. 화명동이란 이름이 언제부터 유래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곳에는 삼국시대 초기에 해당하는 고분군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마을이 고대부터 있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화명은 회붉이〔日明〕에서 온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즉 해가 화(華)가 되고, 붉이 명(明)이 되었을 것이다. 화명동에는 화명이란 마을 이름이 없으며 화잠(華岑)이 제일 가까운 이름이며 조선시대나 최근세의 기록에는 양산군 또는 동래군의 좌면 또는 좌이면(左耳面) 하잠리(華岑里)로 나와 있다. 1936년 행정구역 개편 때 동래군 좌이면에서 부산시로 편입되었다. 화명동은 북쪽부터 대천(大川)·와석(臥石)마을 또는 화잠(華岑)·용당(龍堂)·수정(水亭)마을의 4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1963년 행정구역 개편 때 동래군 좌이면에서 부산시로 편입되었다. 화명동 신시기자 조성으로 인구가 증가하면서 화명1,2,3동으로 분동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대천마을, 용동골마을, 화잠마을, 수정마을, 대장골마을, 용당마을 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