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혁
영도는 부산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인 동삼동․아치섬․영선동 등의 조개무지(패총)로 유명한 곳이다. 이들 유적지에서는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하여 석기 등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그 시기는 대략 6000~5000전의 신석기시대에 해당된다. 이로 보아 영도지역에서는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청동기시대에도 영도지역에는 사람들이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삼한시대에는 변진 12국중 거칠산국(居漆山國)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삼국․통일신라 때는 신라초기 군현개편으로 거칠산국은 거칠산군으로 편제하였고, 또 일부 지역에는 대증현에 소속되어 신라의 지배를 받았을 것이다. 통일신라시기의 영도는『삼국사기』권34, 지리1 동평현조에 의하면, “대증현은 신라 경덕왕 때 동평현으로 개칭되었다”고 하고 있으므로 동평현에 속했다고 할 수 있다. 절영도(絶影島)란 지명은『동래부지(1740)』에 의하면, 이곳은 태종무열왕이 활을 쏘던 장소였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일신라 말기에는 후백제의 왕이었던 견훤의 지배를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신증동국여지승람(1530)』권23, 동래현 산천조을 보면, “절영도는 동평현의 남쪽 8리 지점에 있는데, 목장이 있다”고 하고 있다. 따라서 이곳 목장은 명마가 유명하였던 곳으로 절영도란 섬의 이름도 말이 빨리 달려 그림자조차 볼 수 없다는 데서 얻어진 이름이다.
한편, 고려 현종 12년(1021) 지방제도의 개편으로 동래군이 동래현으로 강등되어 울주군에 영속되자, 동평현도 양주군의 영속되었다. 영도지역은 고려시대 동평현에 속했다. 그것은『고려사』권57, 지리2 양주조에 의하면, “동평현은 현종 9년에 래속하였다. 절영도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영도는 계속 동평현의 영역이었는데, 동평현은 태종 5년(1405)에 양주의 속현에서 동래현의 속현이 되었고, 태종 9년에 다시 양주에 속하였다가 세종 10년(1428)에 와서 또 다시 동래현의 속현이 되었다. 따라서 영도는 조선초기 동래현령의 지배를 받은 것으로 보이며, 조선중기부터 동래부사의 다스림을 받게 되었다.
이후 면리제의 실시로『동래부지(1740)』에 의하면, 동평면을 비롯한 7개 면(읍내면․동면․서면․남촌면․북면․사천면․동평면)이 설치되었는데, 영도는 사천면에 속했다. 그후 사천면은『동래부사례(1868)』에 따르면 부산면․사상면․사하면으로 분할되었는데, 영도지역은 사하면으로 편제되고 이때 영선리가 설치되었다. 이후 12개 면으로 개편되었는데, 영도지역은 사중면에 속하면서, 청학동․상구룡동․하구룡동 등의 행정동이 설치되었다.
한편, 고종 18년(1881)에는 절영도진(絶影島鎭)이 설치되어 1895년 진이 폐지될 때까지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일제는 1910년 조선의 강점과 더불어 동래부에서 부산부를 분리하였는데, 영도는 부산부의 관할 하에 놓이게 되었다.
1947년 10월 1일에는 일본식 동명을 우리말로 바꾸었다. 1949년 8월 15일 부제가 시제로 바뀌면서 부산시로 개칭되었다. 1951년에는 영도출장소가 설치되었고, 그후 1957년 1월 영도구로 승격되었다. 영도구의 관할 동은 대교동․대평동․남항동․신선동․영선동․청학동․봉래동․동삼동 등이 있다.
남항동
남항동(南港洞)의 옛 이름은 석말추(石末湫)였다. 이 지역의 앞바다에는 큰돌이 있었는데 썰물 때는 돌끝〔石末〕이 조금 보였다가, 밀물 때는 보이지 않은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1885년 절영도 첨사 임익준(任翊俊)이 영도의 지명을 지을 때 동해는 본래 신선이 사는 곳이라 하여 신선과 연관된 이름을 많이 지었다. 이때 석말추는 "신선이 사는 시내가 있다"는 뜻의 영계(瀛溪)로 바꾸어졌다. 1934년 영도대교 개통시 인근 바다를 매립한 뒤 일본식 동명으로 석견정(汐見町)이라 불리었다. 석견이란 "썰물을 본다"라는 뜻인데, 이곳은 남항의 바닷가이므로 바다의 밀물과 썰물을 바로 볼 수 있는 곳이라는 뜻에서 붙여졌다. 광복이후 1947년 7월 일제식 동명 개칭 때 석견1,2,3정목을 이곳이 어업기지 및 수산관련 기관이 운집해 있고 부산의 남항을 끼고 있다 하여 남항동1,2,3가로 바뀌었다. 1961년 남항동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법정동으로 남항동1,2,3가가 있다. 자연마을로는 개안마을, 서간도골마을, 석말추마을 등이 있었다.
대교동
대교동(大橋洞)은 영도의 관문으로 영도대교 가설 때에는 거의 60% 가량은 매축지로 형성되었다. 영도는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의 주거지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무인도로 바뀌었다. 영도가 무인도로 바뀐 원인은 임진왜란 후 왜적의 재침을 두려워한 주민들이 섬을 버려두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그후 초량왜관의 개설과 더불어 왜관과 가까운 까닭에 사민책이 적극 장려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어업 등의 이유로 소수의 주민들이 거주하였지만 전체 100호 미만이었다고 한다. 1881년 절영도진(絶影島鎭)이라는 첨사영이 세워짐에 따라 주민의 수가 점차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대교동은 1914년에 북빈정(北賓町)이라 불리었다. 북빈정은 지금의 자갈치 부근을 남빈이라 하였는데 반하여 북쪽 바닷가의 마을이라는 뜻이었다. 1934년 11월 영도대교가 개통되면서 영도대교의 이름을 따서 대교통(大橋通)이라 불리었으며 광복이후 1947년 7월 일본식 동명 개칭 때 대교동이라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법정동으로 대교동1,2가가 있다.
대평동
대평동(大平洞)은 원래 풍발포(風發浦)라 불리웠다. 풍발은 바람이 이는 것처럼 기운차게 일어나는 뜻의 지세에서 붙여진 이름인 것이다. 그리고 이곳은 원래 영도에서 떨어져 있었던 섬이었다고 한다. 남항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금의 대교맨션이 위치해 있는 14통을 비롯하여 15~19통 일대는 바다였고, 일제시대 영도의 서북쪽을 매립하여 갑정(岬町)이라 하였다. 갑(岬)은 산허리 또는 바다로 뽀족하게 내민 땅이란 뜻으로 매축되기 전의 지형적 특성에서 이름지어졌던 것이다. 대평동은 매립이전에는 파도가 거칠고 바람이 강해 풍랑을 피하기 알맞은 곳이기 때문이다. 이 무렵 일본 어선단이 대평동을 정박지로 삼아 이곳 대풍포를 중심으로 많은 선박이 모여들었다. 광복 이후 1947년 일본식 동명을 우리동명으로 개칭 때 파도와 바람이 잔잔해지길 바라는 뜻에서 풍(風)을 평(平)으로 바꿔서 대평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곳은 영도대교가 가설되기 이전 남포동 사이를 운항했던 나룻터가 있었던 곳으로 지금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법정동으로 대평동1,2가가 있다.
동삼동
동삼동(東三洞)은 상리·중리·하리의 3개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이 세 마을이 영도의 동쪽에 있다하여 동삼동이란 동명이 얻어진 것이다. 이곳은 신석기시대의 유적인 조개무지(패총)가 있는 것으로 보아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후 영도가 사람이 살지 않은 섬으로 남겨져 있을 때 동삼동 지역은 어장으로 어민들의 출입이 빈번했으며, 절영진이 설치되기 이전에 가장 먼저 마을이 형성된 곳이기도 하다. 동삼동 상리는 웃서발(上西跋)이라 하고, 하리는 아랫서발(下西跋)이라 하여 어장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리는 검정방우〔黑岩〕라 불렀으며, 옛 진(鎭)이 설치되었던 부근은 동지(東池)라 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지형 지세에 붙여진 이름이다. 아랫서발에는 팔준마(八駿馬)가 물을 먹었다는 감연(甘淵)· 감지(甘池) 또는 감정(甘井, 甘訂)이라 부르는 연못이 있어 당시 목마른 말들이 이곳에서 목을 적셔 갈증을 면하였던 곳으로 목장이었던 영도에서 가장 신선한 연지(蓮池)로 손꼽혔다. 절영도에는 목마장이 생김에 따라 첨사 임익준(任翊準)은 웃서발을 상리로 개칭하였다. 이때 중리는 영도의 봉래산으로 신선이 사는 곳인데 이중 진소(鎭所)가 있던 동지(東池)는 바로 신선이 사는 곳이라 하여 영주(瀛州)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광무 7년(1903) 행정개편 때 사중면 상구룡동(上驅龍洞)·하구룡동(下驅龍洞)이었다가, 1931년 동산정(東山町)이라 불렀다. 광복 이후 1947년 7월 일제식 동명 개정 때 동삼동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1985년 급격한 인구증가로 인하여 동삼1,2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상리, 서발리, 선암리, 중리, 하리마을이 있다.
봉래동
봉래동(蓬萊洞)의 유래를 살펴보면, 영도는 하나의 큰산으로 되어 있는 섬으로 조봉(祖峯)·자봉(子峯)·손봉(孫峯)의 세 봉우리가 있다. 이 산의 이름을 일제시대 이후 한때 세칭 고갈산(沽渴山 또는 枯渴山)이라 불러왔다. 절영도진의 첨사로 가장 오래 재임한 임익준(任翊準)이 영도의 지명을 한문식으로 고쳐 지을 때 이곳이야말로 신선이 사는 곳이라 하여 산 이름을 봉래산(蓬萊山)이라 명명하였다. 봉래산은 영도의 모든 동이 봉래산 아래에 흩어져 있는데, 봉래산의 주맥(主脈)이 이곳에 닿은 곳이라 하여 봉래동(蓬萊洞)이란 이름이 지어진 것이라 한다. 1896년 행정구역 개편 때는 동래부 사하면 영선리에 속했다가, 1905년 영선정 (營繕町)으로 개칭하였고, 1944년 항정(港町)1,2,3,4정목으로 바뀌었다. 1947년 7월 일제식 동명 개정 때 우리의 고유지명인 봉래동1,2,3가로 개칭하였다. 1961년 동명개정 때 봉래동1,2,3가를 봉래1,2,3동으로 개정하였다가 1979년 봉래3동을 봉래3,4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법정동으로 봉랭동1,2,3,4,5가가 있다. 자연마을로는 나릿가마을이 있었다.
신선동
신선동(新仙洞)에는 언제 때의 묘당(廟堂)인지 알수 없으나 오랫동안 많은 전설이 얽힌 영도의 수호신을 모시는 산제당·하씨당이라는 당집이 있었다. 봄·가을 두번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이 당집은 영도초등학교의 전신인 사립옥성학교 시절까지 울창한 산림사이에 있었으나 학교 부지확장에 따라 훼손되었다. 이 하씨당은 원래 아씨당에서 연유된 것으로 풀이되는데 여자를 주신으로 모신 것이었다. 당의 주인이 여신선인 까닭에 1885년 첨사 임익준이 영도의 지명을 정할 때 새로운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뜻으로 신선이라 지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인 1944년 북서쪽의 개펄을 매립하여 산수정(山手町)이라 불렀으나, 1947년 7월 일본식 동명 개칭 때 신선동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지역이 봉래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데다 수목이 울창하고 높은 지대라 선인이 살았다고 전하는 선경(仙境)의 지대이며 광복후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뜻에서 동명을 지었다고 한다. 1961년 동명개정 때 신선동1가를 신선1동으로, 신선동2,3가를 신선2동으로 개칭하였다가, 1966년 신선2동을 신선2,3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법정동으로 신선동1,2,3가가 있다.
영선동
영선동(瀛仙洞)은 영도에서 제일 먼저 마을이 형성된 곳으로 대한제국 건양(建陽) 원년(1896)에 행정체계가 전국 8도에서 13도로 개편될 때 동래부 사하면 영선리란 지명이 제정되었다. 당시의 영선동 영역은 지금의 봉래동·신선동·남항동·대평동 일대로 옛 이름은 나릿가(津)였다. 1885년 절영도 첨사 임익준이 영도의 동명을 새로이 지을 때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동해에 잇는 전설상의 섬 이름인 영주(瀛州)의 이름을 따서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 울창한 숲이 우거진 산기슭이라는 뜻에서 영선(瀛仙)이라 지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인 1925년에는 이곳을 일본쪽을 바라보기에 좋은 곳이라 하여 어영정(御影町)1,2,3정목(丁目)이라 하였다. 광복 이후 1947년 7월 일제식 동명 개정 때 우리의 지명인 영선동1,2,3,4가란 이름을 다시 찾게되었다. 1965년 영선동1,2가를 영선1동으로, 영선동3,4가를 영선2동으로 개칭, 1982년 신선2동 일부를 영선1동으로 편입시켰다. 자연마을로는 나릿가마을, 성발축마을, 제2송도마을이 있었다. 법정동으로 영선동1,2,3,4가가 있다.
청학동
청학동(靑鶴洞)은 선사시대의 패총(조개무지)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예부터 조상들의 주거지였음이 분명하다. 임진왜란 이후 영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으나, 한말에는 6호의 가구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청학동의 동명은 이곳이 숲이 울창하여 청청(靑靑)하고,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이 지대가 학맥설(鶴脈說)에 따라 해운대에서 영도를 바라보면, 마치 학(鶴)이 남쪽으로 날으는 형상을 이루고 있다하여 청학동이란 동명을 짓게되었다고 한다. 청학동이라 하기 이전에는 지금의 청학동시장과 부산은행지점 바닷가 일원을 조내기라 불러왔다. 조내기 일대는 어장으로 많은 생선이 잡혔다고 한다. 어장의 개발에 따라 뚜겁바구, 넉섬방우, 덤버들 등의 해안지명이 생겨나고, 이후 인가가 들어섬에 따라 조내기라는 지명도 얻게되었다. 조내기란 지명의 유래는 두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이곳의 바닷가는 낮고 개펄이 많아 썰물 때는 물이 군데군데 고여있는 조락(潮落)한 곳이 많아서 붙여졌다고 한다. 또는 통신사(通信使) 조엄이 일본에서 고구마를 가져와 이곳에서 처음으로 재배하여 조씨가 고구마를 캐내기 시작하여 조내기라고 하였다고 하는데, 확실한 근거는 현재까지 밝히지 못하고 있다. 1903년 행정구역 개편 때 동래부 사중면 청학동이었다가, 1944년 청학동을 청산정(靑山町)으로 개칭하였다. 광복 이후 1947년 7월 일제식 동명개칭 때 청학동으로 바꾸었고, 1970년 청학1,2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광암마을, 석탄고마을, 일산봉마을, 조락마을, 청학마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