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번 | 성명 | 생몰연대 | 주요업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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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최치원 (崔致遠) |
857년~? | 신라의 학자 겸 문장가. 전국을 방랑할 때 부산의 바닷가에 잠시 머물렀는데, 이때 동백섬 인근 바위에 자신의 자(字)를 따서 ‘해운대(海雲臺)’라는 글씨를 새김. |
2 | 정서 (鄭敍) |
1115년경~? | 고려 전기의 문신. 인종의 총래로 10년 동안 승진을 거듭하였으나 의종이 즉위한 후 모반 사건에 엮여 동래로 귀양옴. 귀양살이 하면서 의종을 그리며 「정과정곡」이라는 노래를 만듦. |
3 | 장영실 (蔣英實) |
?~? | 조선 전기 부산 출신 과학기술자. 장영실의 어머니는 동래현의 관노임.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와 측우기 등 발명하여 조선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함. |
4 | 이선 (李選) |
1632년~1692년 | 조선 후기 기장에 유배된 문신. 1689년 기사환국이 일어나 기장으로 유배됨. 유배생활하면서 『송강가사(松江歌辭)』를 비롯한 송강‧정철 문집 일부를 정리함. |
5 | 한상동 (韓尙東) |
1901년~1976년 | 고신대학교를 설립한 신학 교육자.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에 대한 저항과 반대 운동을 전개함. 친일 청산을 위한 교회 쇄신 운동을 전개함. 고신대학교를 설립하여 신학교육에도 힘씀. |
6 | 박원표 (朴元杓) |
1910년~1986년 | 향토사학자. 전문적인 향토사 연구를 위해 부산향토연구회를 조직하여 부산 향토사 연구의 개척자 역할을 함. 『부산 변천사』 등 부산 역사 관련 저술 활동을 함. |
7 | 박필채 (朴苾采) |
1842년~1925년 | 근대 부산에서 활동한 교육자. 유림의 추천으로 동래부의 면훈장(面訓長)됨. 신학문을 배척하지 말고 배울 것을 권하면서 신식 학교의 설립과 교육에 참여함. 1910년 국권침탈 후 교육활동을 중단함. |
8 | 손진태 (孫晉泰) |
1900년~? | 부산 출신 역사 민속학자. 1920년대와 1930년대 초반 수차례 경상남도 해안 일대 등을 답사하면서 설화‧민요 등의 민속 자료를 수집하고 민속 문화 연구에 힘씀. |
9 | 우장춘 (禹長春) |
1898년~1959년 | 부산에서 활동한 육종학자. 1936년 종의 합성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육종학자의 입지를 굳힘. 한국농업과학연구소를 운영하기 위해 귀국함. 동래 온천장의 원예시험장에서 한국적 토양에 맞는 농법 개발에 힘씀. |
10 | 윤인구 (尹仁駒) |
1903년~1986년 | 부산대학교를 설립한 교육자. 3‧1운동에 참여한 후 일제의 압박이 심해져 일본으로 유학감. 광복 직후 경상남도 내무부 학무과장이 됨. 부산대학교 재건에 매진한 결과 1953년에 부산대학교는 종합대학으로 재탄생하였고, 초대 총장에 취임함. |
11 | 조명기 (趙明基) |
1905년~1988년 | 부산 출신 한국 불교학자. 일본 유학시절에 흩어져 있던 원효 관련 자료들을 수집‧연구함. 광복 직후 불교 혁신 운동을 전개함. 팔만대장경 번역 등 불교 대중화에 노력함. |
12 | 정중환 (丁仲煥) |
1914년~2001년 | 부산에서 활동한 역사학자. 광복 후 부산대학교‧동아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임하면서 역사 연구와 교육에 힘씀. 부산시 문화재위원‧시사편찬위원 등의 활동 통해 문화재 보존과 관리에도 심혈을 기울였음. |
13 | 최한복 (崔漢福) |
1895년~1968년 | 부산 출신 교육자 겸 향토사학자. 약 40년 동안 초등학교에서 민족정신과 애향심 실천하고 교육함. 수영에 관한 역사 자료와 민속자료 발굴‧보존을 위해 노력함. 「수영야류」를 정리하고, 수영지역의 역사를 기록한 『수영유사』 집필함. |
* 부산의 인물은 『부산을 빛낸 인물』(전3권, 2001년~2003년) 수록 인물을 분야별로 재정리함.
** 부산의 인물에 관한 자세한 것은 부산소개 > 부산의 역사 > 향토사도서관을 이용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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