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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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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중구는 배산임해의 지형으로서 평지가 적은 곳이다. 삼한시대에는 변한에 소속되었다가 거칠산국(신라)에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 후 거칠산국이 신라에 정복되면서 거칠산군으로 편제되었고, 대증현이 설치되었다. 중구지역은 위치로 보아 대증현에 소속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시기에는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대증현은 신라 경덕왕때 동평현으로 개칭되었다"고 하고 있으므로 동평현에 속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고려 현종 12년(1021) 지방제도의 개편으로 동래군이 동래현으로 강등되어 울주군에 영속되자, 동평현도 양주군에 영속되었으므로 중구지역은 양주의 관리하에 있었다. 그러나 중구는 조선시대 이전의 거주민의 활동을 전하는 역사적인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조선 태종대부터 부산포(현 좌천동 일대)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 왜관이 설치되었는데, 중구지역에는 광해군 원년(1609)에 두모포(현 수정동)에 설치되었던 두모포왜관이 숙종 4년(1678) 초량(현 용두산 일대) 지역으로 이건하여 초량왜관이 설치되면서 국가간 교류지역의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들 지역은 동래부의 동평면 해정리의 일부와 사천면 하단의 신초량리 일대가 이른바 초량왜관의 자리였다. 1876년 제국주의에 의한 근대개항으로 종전의 왜관은 일본인의 전관거류지, 일본조계지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일제가 조선을 본격 지배하면서 이 지역은 1910년 무렵 종전의 동래부에서 부산부의 관할지역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중구지역이 일대 확장과 부산의 중심지로 기능을 하게 된 계기는 이 시기의 매축공사였다. 이로 말미암아 부산 중구에 북항과 남항의 근대적인 항구로 바뀌면서 부산항은 비로소 무역 항구로서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이 지역을 중구라고 부르게 된 것은, 1951년 구제 실시를 전제로 6개의 출장소가 설치될 때 부산의 중심부에 위치한다 하여 중부출장소라 하였던 데서 비롯된다. 이때 중부 출장소가 관할하게 된 동수는 14개였다. 그후 1956년 부산시 조례개정에 의해 중부 출장소 관할 부평1 ,2동을 부평동으로 통합하였고, 광복동, 창선동, 신창동의 3개동을 광복동에 병합함으로써 10개동으로 줄어들었고, 1957년 구제(區制)실시에 따라서 중구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지역은 부산광역시 15구, 1군 가운데 그 행정구역이 가장 좁으면서도 국제시장, 자갈치시장 등의 상가와, 수출입 화물선과 국내외 여객선이 쉴새없이 드나들고 있는 부산항의 중심지이자 국가경제의 전략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해상운송만의 전진기지라 할 수 있고, 부산에서도 가장 많은 금융기관, 남포동을 중심으로 한 부산상권의 중심지로서 유행과 멋을 창조, 선도하는 패션의 진원지이다. 현재 중구의 관할 동은 중앙동, 동광동, 대청동, 보수동, 부평동, 광복동, 남포동, 영주1, 2동 등이 있다.

관할행정구역

중앙동(中央洞), 동광동(東光洞), 대청동(大廳洞), 보수동(寶水洞), 부평동(富平洞), 광복동(光復洞), 남포동(南浦洞), 영주제1동(瀛州第1洞), 영주제2동(瀛州第2洞)

주소 및 전화번호
[48926] 부산광역시 중구 중구로 120 (Tel : 051-600-4000)

자료관리 담당부서

자치분권과
051-888-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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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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