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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역사

부산이란 지명은 부산포에서 유래된 것으로 15세기의 전반기까지만 하더라도 부산포(富山浦)라 하였고,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지금 동구 좌천동에 있는 증산의 모양을 따서 부산(釜山)이라 불렀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부산포는 당시의 독립된 지방행정 단위는 아니었다. 초기에는 동래현과 그 속현이었던 동평현의 관할 아래에 있었고, 그 후에는 계속해서 동래도호부(東萊都護府)의 구역내에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 태조 6년(1367) 동래에 진(鎭)이 설치되고, 병마사가 동래의 행정관인 판현사(判縣使)가 겸임하게 되었다. 한편, 동래현의 속현인 동평현(현 당감동 일대)은 고려 때는 양주의 영현이었으나 태종 5년(1405)에 동래현의 속현이 되었고 동왕 9년 (1409)에 다시 양주에 속하였다가, 그후 세종 5년(1423)에는 병마사가 첨절제사로 개칭되었고, 판현사를 겸하게 되었다. 세종 10년(1428) 다시 동래현의 속현으로 현령의 행정적인 지휘 감독을 받았으며, 그후 속현제도가 없어짐에 따라 동래현에 통합되었다. 세종 22년(1440)에는 부산포에 일본인의 내왕이 빈번하게 되자, 진을 속현인 동평현으로 옮겼다가 동래로 환진하였고, 다시 판현사를 현령으로 바꾸었다.

그후 명종 2년(1547)에 도호부로 승격시켜 무관을 부사로 임명하고 그 아래 판관을 두었으나, 선조 34년(1601)에 외교상의 사정을 감안 당상의 문관을 부사를 삼고 판관제도를 폐지하였다. 효종 6년(1655)에는 동래부에 독진을 설치, 숙종 16년(1690)에는 부사가 방어사를 겸임하게 되었으나, 2년 후에 방어사는 없어졌다. 영조 15년(1739)에는 부사가 동래성과 금정산성의 수성장을 겸임하여 고종 32년(1895)까지 계속되었다.

군사적으로는 고려말부터 계속되는 왜구의 창궐로 그 폐해가 심하였다. 이에 태종 7년(1407년) 부산포와 내이포 두 곳에 왜관을 두어 일본인의 내왕과 함께 교역을 허용하였으나, 왜구의 침탈이 계속되자 세종 원년(1419) 왜구의 소굴이었던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이후 왜의 국교 재개의 간청에 따라 세종 5년(1423)에는 부산포와 내이포에 다시 왜관을 두고, 동왕 9년에는 울산 염포에도 왜관을 설치하였다. 세종 25년(1443)에「계해약조」를 맺어 무역선의 수와 세사미두의 수량을 제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삼포의 왜관은 지역을 제한하고, 임진왜란 이후에도 동래부사가 일본사신을 접견하였으며, 왜관에서만 왜인들의 거주가 허락되었다. 왜관 주위에는 복병막소를 설치하여 왜인은 물론 조선인의 출입을 통제하였고, 허가를 받은 사람만 출입이 허용되었다. 부산포에 설치된 왜관의 변천을 보면, 태종대에서 중종 5년(1510)「경오왜변」이전까지는 부산포왜관(현 자성대 부근), 선조 36년(1603)에는 잠시 절영도왜관(현 대평동 부근 )에 있었고, 선조 40년(1607)에 두모포왜관(현 수정시장 일대), 숙종 4년(1678)부터 고종 13년(1876)까지 초량왜관(현 용두산과 복병산 일대)이 존속하다가 1876년「강화도조약」체결 이후에는 전관거류지로 바뀌었다.

부산(동래)은 나라의 관문이었기 때문에 국방상 요충지였다. 즉 금정산성은 그 규모로 볼 때 국내 최대의 산성이며, 국방시설도 발달하여, 지금의 수영에는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부산진에는 부산진영이 설치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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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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