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혁
남구지역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최근의 해운대의 청사포와 신시가지 개발지역에서 구석기 유물이 채집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사람이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청동기시대의 경우 이전 남구의 영역이었던 수영동(좌수영)에서 마제석검이 출토된 바 있다. 따라서 청동기시대에는 사람이 주거하였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삼한 및 삼국시대 초 남구지역은 거칠산국(居漆山國)의 영역 하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삼국사기』권44, 거도전에 의하면,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을 병합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다.『삼국사기』권34, 지리지에는 “동래군은 본래 거칠산국이었는데 경덕왕 때 동래군으로 고쳐 지금도 이를 따르고 있다. 영현이 둘이다”라고 하고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1530)』권23, 동래현조에는 “옛 장산국(萇山國)이다(혹은 내산국이라고도 한다) 신라가 점유하고는 거칠산국을 두었는데,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고 하고 있다. 따라서 남구지역은 거칠산국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고려사』권57, 지리2 울주조에 의하면, “속현이 둘이 있는데, 동래현과 헌양현이다”라고 하고 있다.『고려사』권57, 지리2 동래현조에 의하면 “현종 9년에 본주(울주)에 소속시켰으며 후에 현령을 두었다. 이 현에는 온천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신증동국여지승람(1530)』동래현 고적조에는 4개의 部曲(古智島․調井․兄邊․富山)과 1개의 향(生川)이 존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 중 형변부곡은 확실하지는 않으나 신선대 부근의 용당동으로 추정하고 있고, 생천향은 생천언이 있었던 대연동 부근으로 추측하고 있다.
한편,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을 태종조에 울산 개운포에 있던 것이 임란 직전 부산 수영으로 옮겨졌다. 임란 직후인 인조 13년(1635)에 남구 감만동으로 옮겨와 수군의 요충지였다. 그러나 이곳은 왜관과 거리가 가까워 군사기밀이 누설될 우려가 있다하여 효종 3년(1652)에 다시 오늘날의 수영으로 이전되기까지 조선시대 군사시설의 중요 기지였다.
조선후기 남구의 행정구역 변화는『영남읍지(1895)』를 살펴보면, 9면(읍내면․동면․복면․서면․남촌면․동평면․부산면․사상면․사하면) 131동리,『경상도동래군가호안(1904)』에는 12면 154동리로 변화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남구지역은 조선후기 이후 남면(남촌면․남하면․남상면)과 동면의 일부가 그 영역이었을 것이다. 남촌면의 영역은 축산동․숭정리․감포리․동부리․남문외리․남천리․대연리․석포리․분포리․용당리․감만리 등이다.
일제시대의 오늘날의 남구지역은 1914년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동래군 서하면과 용주면에 소속되었다. 1936년에는 용주면과 남면 일부가 부산부에 편입되어, 신설된 부산진출장소(대연동․용호동․우암동․감만동) 소속으로 되었다. 1953년에는 대연출장소 소속이 되었다. 1957년에는 구제 실시로 부산진구 대연출장소와 동래구 수영출장소로 개편, 1973년에는 시직할 대연출장소로 승격되었다. 1975년에 남구로 승격되었다.
감만동
감만동(戡蠻洞) 바닷가에는 감만포가 있어 조선초기에 수군진영을 두었다. 감만포란 포구의 이름은 그때 수군이 주둔하면서 오랑캐에 이긴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으로 여겨진다. 감만이라고 기록되기도 했는데 이(夷)자도 오랑캐란 뜻과 벤다, 친다는 뜻을 가졌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이곳으로 유인해 전멸시켜 감만 (오랑캐에 이기다)이란 이름이 생겼다고도 하나 "감만이"는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그 이름이 있었다. 또한 일본측 기록을 따라 "가마리 釜里 "로 보고 부산의 지명과 유관하게 보기도 하나 그는 일본사가의 아전인수격인 식민지사관에서 온데 지나지 않는다. 일본인이 말하는 "가마"란 일본말의 "감"인 우리말의 "두꺼비"로 말했으니 해괴한 말이 아닐 수 없다. 감만동은 수군진영에서 오랑캐를 쳐서 이긴다는 뜻으로 따온 이름이다. 조선시대 이곳은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을 태종 때 울산 개운포에 있던 것을 임란 직전 수영으로 옮겨졌다가, 임란 직후인 인조 13년(1635)에 이곳 감만으로 옮겨와 수군이 주둔해 있었다. 그러나 왜관과 거리가 가까워 비밀의 누설 우려가 있다하여 효종 3년(1652) 다시 수영으로 이전되기까지 주요 군사요충지였다. 자연마을로는 감만마을, 모래구찌마을, 적기마을이 있었다.
대연동
대연동(大淵洞)은 옛날에는 못골이라 했다. 못이 있는 골짜기란 뜻이었다. 그 못은 아주 커서 마을의 이름을 지을 때 큰못이란 뜻으로 큰 대(大), 못 연(淵)이 된 것이다『동래부지(1740)』에는 이 못을 길이 18척, 너비 125척이라 했다. 옛날에는 이 못의 수원을 이용하여 대연동 일대 50만평 넓은 논을 경작할 수 있었다. 일제시대인 1930년에는 수리조합이 조직되어 옛날부터 있던 못(현재 남구청 자리)의 윗자리에 둑을 쌓아 다시 새로운 못을 만들었다. 못이 있는 골짜기라 하여 못골이라 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 못도 흔적이 없고 주택가로 바뀌었다.『동래부지』제언에는 생천언이란 제언이 기록되어 있는데 못골에 있었던 못은 바로 이 생천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못은 일제시대까지 남아 있었는데 그 축조방식이나 수법으로 보아 신라시대 이전의 못으로 추정된다고 한다.『동국여지승람(1481)』동래현조에는 향과 부곡이 있었는데, 향이 바로 생천향(生川鄕)이다. 생천향은 생천언과 이름이 같은 것으로 보아 신라 및 고려 때에 생천향의 옛땅일 것으로 추측된다. 오늘날 대연동은 일제시기 대일리(大一里)·대이리(大二里)로 불리다가, 1940년 동래군 남촌면 대연리로 바뀌었다. 1953년 대연동으로 되었다가, 1970년 대연1,2동으로 분동되었다. 1975년에는 대연3,4동이 분동되었고, 1979년에는 대연5,6동이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낙농마을, 당곡마을, 못골마을, 사분포마을, 석포마을, 용소마을, 지곡마을이 있었다.
문현동
문현동(門峴洞)의 옛 이름은 찌께골이라 한다. 찌께골은 지게골에서 온말로서 지게는 마루나 바깥에서 방으로 드나드는 곳에 문종이로 안팎을 두껍게 싸서 바른 외짝문이라는 뜻이다. 이 일대의 지형은 양쪽에 산에 의해 에워싸여 있어 마치 집안의 방으로 들어가는 문과 같기 때문에 옛날부터 찌께골로 불러왔다. 일제강점기까지만 하여도 인가는 적었고, 찌께골 고개밑의 좌우에 초가만 드문드문 있었다고 한다. 한편, 문현과 관련하여 이와는 다른 이야기가 전해내려 오고있다. 문고개라 함은 문현안동네 즉 성동초등학교의 동편의 문현1동쪽에 상당히 높은 고개가 있었는데, 이를 문고개라 했다는 것이다. 문고개의 유래는 조선후기 문안동네에 영산 신씨가 먼저 들어와 살았고, 그후 문밖동네에 몇집이 생기게 되어 이 두 마을에 사람이 왕래할 때에는 이 고개가 문의 구실을 하였기 때문에 문고랑 명칭이 붙었다 한다. 1919년 동래군 서면 문현리에서 1946년 문현동으로 개칭되었다. 1957년에는 부산진구 문현동이 되었다가, 1962년 문현1,2동으로 분동되었다. 1975년 1월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산진구에서 남구에 편입되었고, 동년 7월 문현3동이 분동되고, 1982년 문현4,5동의 분동되었다. 1999년 문현5동이 문현2동에 통합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농막마을, 문현마을, 연동마을, 웃농막마을이 있었다.
우암동
우암포(牛岩浦)는 예부터 천연의 포구로 배가 정박하기에 편리한 곳이었다 한다. ‘우암(牛岩)’이라는 이름은 전해오는 이야기를 살펴보면, 이 포구안의 언덕에는 하나의 큰 바위가 있어 그 모양이 소모양과 같다하여 이곳 포구를 우암포라 하고 동리명을 우암이라 불렀다 한다. 일제시대 때 바다의 매축을 위해 산을 굴착하였는데, 이때 소모양의 바위가 없어졌다 한다. 우암이란 이름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1678년 이후의 조선과 일본 양국의 외교문서인『대마도문서』,『조선사무서』,『동문휘고』에 우암포라는 이름이 자주 나오고 있다. 이로 볼 때 적어도 조선 숙종 이전에는 명칭이 생긴 것으로 생각된다. 숙종 때의 표류민 접수처의 지역은 지금의 우암동 서쪽 높은 지역에 해당되는 지점이라 한다. 원래 철우(鐵牛)는 중국 고사에 전하고 있는데, 우(禑) 임금이 수환(水患)을 막기 위하여 철우를 만들어 강물에 집어넣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곳 우암포의 지세는 동천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라 이 지역에 수재(水災)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기원에서 명칭을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광복이후 일본에서 돌아온 귀환동포와 한국전쟁으로 인한 다수의 피난민의 정착으로 인구가 급증하였다. 1953년 대연출장소 우암동이 되었다가, 1976년 12월 우암1,2동으로 분동되었다. 자연마을로는 우암마을이 있었다.
용당동
용당동(龍塘洞)은 신라시대 때 남해신(南海神)에 제사하는 중사(中祀,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가 행하여진 형변부곡(兄邊部曲)의 위치로 추정된다. 용당이라 함은 지금의 상하 용당리의 중간에 옛날 큰 못(澤 : 塘)이 있었고, 이 못을 둘러싼 부근 산세가 용의 모양과 같다하여 이 못을 중심으로 한 일대를 용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용마산이 용이었다는 전설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옛날 어느 해에 용마산의 앞머리 부분인 신선대 앞을 절단하여 토지를 일구었던 적이 있었는데, 이곳을 잘랐을 때 땅속에 붉은 혈흔이 보였다고 한다. 그후 이 마을에서는 예기치 않았던 재앙이 생기기 시작하였는데, 농사가 잘되지 않는가 하면 이 지역 김씨 문중의 젊은이들이 시름시름 앓다가 한 해에 수십명씩 죽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용당이란 지명은 지형이나 지세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고, 형변부곡의 위치에서 생겨난 지명으로 풀이된다. 용당은 해신을 모시는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곧 용왕을 모신 당집이 있었다는데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부산지역에는 용(龍)자가 붙은 지명이 많은데, 이는 모두 해신(海神)이나 기우소(祈雨所) 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거나 풍수사상의 영향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이후 계속 용당리로 불리어 오다가 1959년 동명 개정 때 용당동으로 바뀐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용당마을이 있었다.
용호동
용호동(龍湖洞)의 장산봉 아래에 호수 같은 못이 있었는데 그 못에 하늘을 오르지 못한 용이 이무기(깡철이)가 되어 있었다고 해서 용호동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용호동은 인가라고는 거의 없었고, 소금을 굽는 동이〔盆〕만 여기저기 있어 동이 있는 갯가라는 뜻에서 분개(盆浦)라 불려졌던 것이다. 염전은 중앙에 진흙으로 1평 정도의 구덩이에 파놓은 것이 있는데, 이 구덩이를 서실이라 한다. 서실속에는 깨끗하고 결이 고운 모래를 넣어 두고 있는데 이를 파내어 염전에 엷게 써레질하여 둔 다음, 바닷물을 끌어들이면 햇빛에 물기는 증발하고 염분만 모래에 엉켜 보얗게 된다. 이 보얗게 된 모래를 다시 서실에 넣고 바닷물을 길어 부으면 염도가 아주 짙은 소금물이 서실밖으로 넘쳐나는데 이를 작은 개울을 통하여 가마에 받아 끓인 것이 이른바 소금이다. 이 서실을 한자식으로 표기할 때 분(盆)이라 불렀다.『동래부지(1740)』에는 "분포리(盆浦里)는 부의 관문에서 남으로 28리 거리에 있다"고 하고 있다. 용호동이란 이름을 처음으로 쓰게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부터이며, 일설에는 용호동에 작은 호수가 하나 있었는데 승천하지 못한 용(이무기)이 살았다는 전설에서 생긴 동명이라 한다. 1975년 10월 시조례에 의해 용호1,2동으로 분동되었고, 1982년 9월 용호3동이, 1983년 용호4동이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분개마을, 용호농장마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