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시대
삼국시대 이전의 부산지방은 가야영역에 속한 동시에 가야문화권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1세기 무렵의 부산지방에 있었던 일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서『삼국사기』(44권) 거도열전(居道列傳)에 의하면, "거도는 탈해이사금 때 벼슬하여 간(干)이 되었다. 이때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이 이웃 지경에 끼어 있었는데 자못 나라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거도는 변방 관원이 되어 몰래 이를 병합할 뜻을 품고 있었다. 이에 군사를 일으켜 그들이 준비하지 않은 기회에 두나라를 쳐서 멸망시켰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 내용은 당시의 사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헌 기록이다.
이러한 사실은 일찍부터 부산지방은 문화적, 정치적으로 가야세력권 속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부산의 지리적인 여건으로 인하여 일찍부터 팽창 일로에 있는 신라의 정치세력과 접촉하고 있었던 것을 반영한 것이라 보아진다.
한편, 3세기 무렵 부산의 사정은 중국의 문헌인『삼국지』「위지 동이전」에서 엿볼 수 있다. 그 기록 가운데 부산에 관계되는 중요한 사실은 변진한 24국의 국명에 나오는 변진에 대하여 "나라에서 철을 생산하였고, 한인(韓人), 예인(濊人), 왜인(倭人)도 모두 이것을 가져가며, 모든 매매에 철을 사용함을 마치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이 하고, 또 오군에 공급하였다"고 한 부분이다.
이것은 부산의 동래 낙민동 조개무지에서 철을 제련하였던 용광로 터가 발견된 사실이나, 복천동 고분에서 많은 철정이 출토되었다는 사실과 부합된다. 따라서 부산은 삼한시대의 전통을 기반으로 하여 철을 중심으로 하는 수공업이 최고로 발전했고, 이를 배경으로 그 당시 해상 교역의 중요한 거점이었음을 대변하고 있다.
신라시대
부산은 삼국시대 이전의 거칠산국에서 삼국시대 신라의 거칠산군으로 편입되었다. 거칠산국은 장산국이나 내산국으로 불리어지기도 하였다. 거칠산국 또는 거칠산군은 "거친 뫼"에서 따온 것이며, 지금 양정동 뒷산인 황령산의 옛이름이 거친 뫼인 데서 유래하였다고 생각된다.
동래라는 지명의 유래는 변진 24국의 하나인 독로가 동네 → 동래로 변하면서 동래란 중국식 지명으로 다듬어졌다는 설도 있다. 그 유래가 어떠하든 동래현(東萊縣)은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거칠산군을 중국식 지명으로 고친 것이다. 동래현(東萊縣)의 영현인 동평현은 본시 대증현이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당감동을 중심으로 한 부근지역 일대가 여기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부산이 동래군의 관할 하에 있었다고는 하나 사실 신라 때의 경우에는 대증현, 즉 동평현의 관할에 있었다고 함이 옳을 것이다.
부산은『고려사』에 전하는 바와 같이 견훤이 고려 태조에 사신을 보내어 절영도의 명마 한 필을 보냈다가 되돌려 받은 사실에서 볼 때, 절영도의 목마장은 통일신라 이후부터 유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절영도(絶影島)란 이름도 명마가 빨리 달려 얻어진 이름으로 "절영"같은 명마를 사육하는 섬이라는 데에서 생겨난 이름이며, 지금의 영도를 말한다. 한편, 부산은 예부터 천연의 경치가 뛰어나고 온천이 유명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었다.
해운대와 동래의 온천은 신라 때부터 널리 알려져 있어서 왕,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찾기도 하였다. 신라 태종무열왕이 태종대에 와서 사냥하고 유람한 데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는 태종대라든지, 최치원 선생이 거쳐 간 전설에서 유래된 해운대 등은 예부터 널리 알려진 명승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