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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구

연혁

해운대지역에서 구석기시대의 유적인 청사포, 해운대 신시가지인 좌동 그리고 중동(中洞)에서 대규모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이들 구석기유적은 영남지역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의 구석기문화 규명에 커다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들 구석기유적의 발굴은 기원전 20,000년경부터 이미 부산․해운대지역에서 사람이 거주하면서, 그들 나름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은 주먹도끼․찍개․긁개․뚜르개․원형석기․망치돌․박편 등 다양하며 석기의 재질과 종류가 상당히 많은 편이다.

해운대지역의 청동기문화는 반여동에서 발견된 주거지는 전기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 조성시기는 기원전 7~8세기경인 것으로 추측된다. 삼한 및 삼국시대 초 해운대지역은 거칠산국(居漆山國)의 영역 하에 있었으며,『삼국사기』권34, 지리지에 의하면, “동래군은 본래 거칠산국이었는데 경덕왕 때 동래군으로 고쳐 지금도 이를 따르고 있다. 영현이 둘이다”라고 하고 있다. 한편,『삼국지』위지 동이전 변진조에는 삼한시대 24개의 국명 중에 ‘독로국’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동래라고 한 설도 있다

이 지역의 옛 국명은 거칠산국․내산국․독로국 등으로 달리 불리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 국명 중에 ‘장산국’이 주목된다. 따라서 해운대지역은 오늘날의 장산과 관련하여 볼 때 삼한 소국과 많은 지역적 연관을 가지고 있다. 한편, 해운대의 지명은 신라 말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고운 최치원이 머물렀다고도 전한다. 그것은『신증동국여지승람(1530)』동래현 고적조에 자세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이로 보아 최치원과 해운대는 많은 연관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해운대는『고려사』권57, 지리2 울주조에 의하면, “속현이 둘이 있는데, 동래현과 헌양현이다”라고 있다. 그리고『고려사』권57, 지리2 동래현조에 의하면, “현종 9년에 본주(울주)에 소속시켰으며 후에 현령을 두었다. 이 현에는 온천이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초기에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속현으로 강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동래부의 행정변천은『동래부지(1470)』에 의하면, 7개면(읍내면․동면․남촌면․동평면․사천면․서면․북면) 82리 19동의 체제로 행정구역이 나누어져 있다. 그리고『동래부사례(1868)』에는 사천면을 제외한 읍내면․동면․북면․서면․남촌면․동평면의 이름은 그대로 있는 반면에 부산면․사상면․사하면이 신설된 것을 볼 수 있다.『경상도동래군가호안(1904)』에 의하면, 동하면과 동상면 중 동대동․석대동․반송동․반여동․중리동․삼어동․무정동 등이 속할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일제강점기 부제실시로 부산부가 설치되었으며, 1914년 군․면 통폐합에 따라 이전 동래부를 부산부와 동래부 일부와 기장군을 동래군으로 개편, 해운대는 남면에 속했다. 1942년 수영출장소에 편입되었다가, 1953년 해운대출장소로 분리되었다. 1963년에는 동래군 기장면의 송정리가 편입되었으며, 1980년 해운대구로 승격되었다. 현재의 관할동은 우동․중동․좌동․반여동․석대동․반송동․재송동․송정동 등이 있다.

반송동

반송동(盤松洞)에 대한 기록은 1740년 편찬된『동래부지』에 동래부 동면 지경리(地境里)로,『동래부읍지(1871)』의 방리조에도 반송리의 기록이 보인다. 반송의 지명이 사용된 시기는 1871년 이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경리란 현재의 반송이 당시 기장현과 동래부의 경계를 이루는 마을이란 뜻에서 사용되었을 것이다. 반송동의 곳곳에 있는 소나무 형상이 소반처럼 펑퍼짐해서 붙여진 동명인 까닭에서인지 이곳에는 반송이 많았다고 한다. 현재의 운봉초등학교 앞에는 수령이 200여년이 넘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는데, 동네사람들은 이를 반송나무굴이라 칭한다. 이 마을에 울창했던 소나무들이 없어지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 마구잡이 벌목으로 인하여 지금은 모두가 없어졌다. 1950년대 초기에는 부산지방의 땔감나무 시장의 나무공급을 거의 반송에서 도맡다시피 했다. 자연마을로는 운봉·본동·신리의 3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운봉은 반송에서 제일 먼저 형성된 마을로 뒷산인 운봉산의 지명에서 유래되었다. 운봉산과 절터산·진들개산·무지산 등이 담처럼 싸고 있어 "담안골"이라 부르기도 하며 멀리 북쪽에 개좌산이 솟아 있다. 운봉산 중턱에 운봉사라는 고려시대의 옛 절터가 있었는데, 축대와 주춧돌의 흔적이 남아 있고 토기 등의 파편이 채집되기도 한다. 이곳은 1968년 부산시 정책이주지역으로 시내의 수재민과 철도연변 철거민들이 이주하면서 동세가 신장되기 시작하여 1975년 반송1,2동으로 분동되었고, 1978년 반송3동이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반송리, 본동마을, 신리마을, 운봉마을이 있었다.

반여동

반여동(盤如洞)은 조선 초기에는 동래부의 동면에, 말기에는 동상면에 속하였다가 일제강점기 때는 동래읍 반여리로 되었다. 반여동이란 지명은 일찍부터 사용된 것으로 지형이 소반처럼 동그랗다는 뜻에서 풍수설의 영향으로 지어진 것이라 한다. 이는 반여동이 장산 아래 마을로 주변의 낮은 산이 군량대(軍糧臺)와 석대동 서쪽의 추마산(趨馬山), 그 북쪽의 시치산(視幟山) 등으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반여동은 원래 상리·중리·무정리(舞亭里)·삼어리(三魚里) 등 네 개의 자연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상리는 가장 윗마을을 뜻하는데 지금의 풍산금속 입구지역이고, 중리는 가운데 마을로 남평문씨, 청도김씨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삼어리는 봄·여름·가을의 세 계절 동안 원동천에서 고기가 뛰어 논다는 풍류적인 뜻으로 지어졌다. 무정리는 왕자아파트 주변으로 해림사라는 절이 있던 산을 오지봉(五指峰)이라 하였는데, 이 오지봉은 다섯 손가락으로 거문고를 타고 춤을 춘다는 무정(舞亭, 춤추는 정자)이 있었다는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반여동고분은 유적 대부분이 이미 훼손되었으나, 고대 부산지역 문화연구에 귀중한 자료로서 삼국시대 이전부터 주거가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자연마을은 임진왜란 이후 형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반여동의 일부는 1972년 부산시의 정책이주지역으로 시내 고지대 철거민들이 정착하면서 생긴 곳으로, 1973년 반여2동으로 분동되고, 1979년 반여2동에서 반여3동으로 분동되었다. 이후 반여1동을 반여1,4동으로 분동하였다. 자연마을로는 고기등마을, 무정마을, 반여리마을, 삼어리마을, 상리마을, 신촌마을, 중리마을이 있었다.

석대동

석대동(石坮洞)의 동명은 조선시대부터 일찍 사용되었으나 그 연원은 잘 알 수 없다. "坮"는 "臺"의 고자(古字)로 한자의 뜻대로 이 지역에는 돌로 쌓은 높은 곳이나 이에 준하는 넓은 반석 등 지명과 관련된 전설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자연마을로 내리(內里)와 상리(上里)가 있으나 이는 안마을과 윗마을이란 뜻으로 석대라는 지명과는 관계가 없다. 동천의 상류를 사천(絲川)이라 부르는데, 이 일대는 물이 맑고 경치가 아름다워 오륜대(五倫臺)·동대(東臺)·죽연대(竹淵臺) 등의 높은 대가 많은 것으로 보아 석대동 일원에도 풍류를 즐길만한 좋은 자리가 있는데서 지명이 유래된 것이 아닐까 짐작하기도 한다. 이곳에는 영양 천(千)씨의 집성촌으로 일문에는 5효자 1효부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마을로 정려각이 세워져 있다. 석대동은 조선후기『동래부지(1740)』에 보면, 동래부 동면에 소속되었다가, 말기에는 동상면으로, 일제강점기때에는 동래읍으로 편입되었다. 1942년 행정구역 확장으로 부산부에 편입되어 동래출장소에 속하였다. 1957년 구제가 실시되면서 동래구에 소속되었다가, 1978년 해운대출장소에 편입, 1980년 이후 해운대구 관할이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상리마을, 석대마을, 하리마을이 있었다.

송정동

송정동(松亭洞)의 지명은 이곳의 세거 씨족인 광주 노씨(盧氏)의 선조가 완만한 백사장이 내려다보이고 해송림이 울창한 언덕에 정자(亭子)를 지은 데서 연유한다고 한다. 지금의 송정 해수욕장 일원은 원래 가래포(加來浦)라 불렀는데, 이는 갈대밭이 있었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 풀이하고 있다. 가래는 갈대를 가리키는 사투리이고, 이전에는 송정천과 바다가 맞닿는 곳에 넓은 갈대밭이 형성되어 있었다. 한편, 송정에는 일본정(一本亭) 이라는 노송이 마을의 상징처럼 서있었는데 6.25이후 병사들의 사격연습으로 고사해 버렸다. 송정이란 지명도 이 노송에서 연유되었다는 설도 있다. 일설에 의하면, 임진왜란 전까지 송정을 가라(加羅)라고 했는데, 임란 때 일본군이 파병 당시 군사들에게 "조선에 가거든 "松"자를 주의해라"고 하여 "송"자가 붙은 마을에는 접근하지 않으므로 재화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지명을 가라에서 송정으로 바꾸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송정은 조선초부터 기장현의 관할이었으나 1800년경부터 잠시 동래부에 속하기도 하였다. 1880년 기장현의 전부와 양산군의 일부가 동래군으로 편입되자 송정일대는 동래군 기장면 송정리가 되었다. 1963년 행정구역 확장으로 부산시 해운대구에 편입되어 송정동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구덕포마을, 송정마을이 있었다.

우동

우동(佑洞)은 1740년 편찬된『동래부지』에는 동면 우동리(右洞里)로, 1882년의『동래부읍지』에는 동래부 동면 우동(右洞)이었다. 1937년『동래군지』에는 남면(南面) 우동(右洞)으로 불리어왔다. 우동이란 명칭이 불리게 된 요인은 해운대의 중심가로 변모한 중동(中洞) 일대의 옛 온천지역인 구남평원(龜南平原)을 가로질러 동백섬 옆 수영만으로 흐르는 춘천천이 있었는데 이의 오른쪽에 자리한 마을이란 연유로 붙여진 듯하다. 그런데 오른쪽 마을의 우리(右里)·우동(右洞)이 일제 때에는 좋은 뜻을 가지는 한자 또는 글자로 바뀌면서 도울 "우(佑)"의 우동(佑洞)으로 바뀐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동에는 장지(長旨)·못안(池內)·운촌(雲村)·승당(勝堂) 등 4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장지와 지내마을은 예부터 농사가 주업이었고, 운촌과 승당마을은 바닷가로 어업을 주업으로 운촌은 해운대에서 가장 먼저 생긴 마을로 해운대의 발상지로 원래는 해운대라 불리어 왔으나 언제부터 운촌이라 불리게 되었는지 정확한 근거는 없다. 다만 옛날 어느 선비가 과거를 보러가기 위해 서울로 가다가 다른 선비들이 자신의 출신지를 남촌이니 북촌이니 하자 자신도 운촌이라 하였다는 것이 유래가 되었다고도 한다. 한때 운촌과 승당마을의 앞바다는 멸치의 황금어장으로 손꼽혀, 4월부터 10월까지 멸치철에는 밤마다 밝히는 횃불을 따라 몰려드는 은백색의 멸치떼들이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1966년 인구의 증가로 인해 우1,2동으로 분동하였다. 자연마을로는 못안마을, 설분곡마을, 승당마을, 운촌마을, 장지마을이 있었다.

재송동

재송동(裁松洞)은 조선시대 이곳에 재송포가 있어 마을을 재송리라 하였다.『동래부지(1740)』의 산천조에 보면, "재송포는 동래성의 동쪽 10리에 위치하며, 소나무가 만 그루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옛날에는 이처럼 소나무가 만 그루나 있는 울창한 숲을 가졌다하여 일명 송수촌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재송동은『동하면 고문서(1787)』에 의하면, "본 면은 당초 상단과 하단으로 나눌 적에 재송동 한 동네를 다섯 동네와 합하여 한 면으로 하였는데, 중년에 재송 한 마을을 상단면으로 옮겨 부쳤다가 지금 다시 부근 사람들이 관청에 청원한 바에 따라 다시금 하단면에 부쳐 예전처럼 한 면으로 한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는 동면(東面)이 동상면(東上面)과 동하면(東下面)으로 나누어지면서 본래 동하면 소속이었는데 동상면으로 이속되었다가 다시 동하면으로 이속하였다는 것이다. 옛날 재송에는 북쪽에 3계곡이 있었는데, 그 이름을 뒷골·서당골·안골이라 하였고 이 3계곡을 통칭하여 뒷골이라 불러왔다. 재송동은 1942년 부산부에 편입되었고 1946년 부산부 수영출장소에 소속되었다가 1957년 동래구에 편입되었다가 1978년 해운대 출장소에 이관되었다. 1980년 해운대구 설치 때 수영강 이서(以西)의 망미동에 접한 지역은 남구로 갈라지게 되었다가, 1982년 법정동 경계조정 때 재송동의 일부를 반여동과 우동에 편입시켰다. 1980년 이후 급격한 인구증가로 인해 1991년 재송1,2동으로 분동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뒷골마을, 재송포마을이 있었다.

중동

중동(中洞)은 해운대의 중심부에 위치한 동리라는 데서 붙여진 지명으로 춘천천의 하류로 바닷가에 접한 지역은 온천마을, 해수욕장 등이 모두 중동지역이다. 대한제국 때에는 대천(大川)·오산(梧山)·미포(尾浦)·신기(新基)·도전(島田)·청사(靑沙) 등 자연마을을 통칭하여 중리라 하였다. 청사포와 미포지역은 바다가 주된 생활터전이었기 때문에 바다와 관련된 풍속행사가 매 4년마다 음력 10월 보름부터 닷새동안 치러지는 별신굿이 유명하다. 굿이 행해지는 기간동안 마을 주민 모두는 금주(禁酒)를 하고, 부부들의 잠자리도 함께하지 않는다. 온 주민이 참여하여 풍어를 기원하고 마을과 집안에 액이 들지 않도록 정성을 다하였다. 자연마을 중 대천은 춘천 하류의 넓은 땅을 지칭하는 것으로 오랜 옛날부터 농업을 주업으로 했던 곳이며, 오산마을은 와우산의 산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원래는 봉림마을이라 불리어 왔는데 지형이 오동잎처럼 생겼다하여 오산마을로 바꾸어 불렀다 한다 신기마을은 새터마을로 청사포에서 분리하여 생긴마을 이란 뜻으로 결혼한 자식을 마을 테두리 안에서 새살림을 내어 주었는데, 그렇게 한집 두집 이루어져 새로이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도전마을은 오산과 미포 사이에 있는 매우 지대가 낮은 마을로 사면이 물로 둘러싸여 큰비가 내리면 섬처럼 보인다해서 생긴 이름이다. 청사포(靑沙浦)는 원래 청사포(靑蛇浦)라 불렸는데, 뜻이 좋지 않아 맑을 "靑"과 모래 "沙"자를 따서 이름을 바꾸었다 한다. 1942년 수영출장소에 편입하여 중1,2정(町)으로 되었다가 1947년 일제식 동명 개칭 때 중1,2동으로 바뀌었다. 1953년 해운대출장소 중1,2,3동으로, 1955년 중1,2동을 병합하여 중1동으로, 1960년 중3동을 중2동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대천마을, 미포마을, 섬밭마을, 신기마을, 오산마을, 온천마을, 중리마을, 청사포마을이 있었다.

좌동

좌동(佐洞)은 1740년 편찬된『동래부지』에는 동면 좌동(左洞) 으로, 1882년의『동래부읍지』에는 동래부 동면 좌동(左洞)이었다. 1937년『동래군지』에는 남면(南面) 좌동(佐洞)으로 불리어왔다. 좌동(佐洞)은 마을의 연혁이나 지명은 우동과 같은 맥락에서 형성되었다고 생각된다. 왼쪽 마을이라는 뜻에서 좌리(左里)·좌동(左洞)이라 부르던 것이 뜻이 좋은 글자를 택하여 좌동(佐洞)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좌동은 춘천상류를 경계로 중동의 대천마을과 인접해 있는 오랜 역사를 가진 마을로 달맞이 길이 생기기 전에는 해운대에서 송정·기장 방면으로 왕래했던 길목으로 김해 김씨의 집성촌이었다. 좌동은 원래 장산의 남쪽 사면의 평야를 낀 지대로 대부분의 지역이 군사보호구역이었다. 1993년 이후 신시가지가 조성되면서 해제되고, 인구 10만명의 신시가가 만들어지면서 전국에서는 유일한 대동제(大洞制)가 실시되고 있었다. 이후 인구의 증가로 좌1,2,3,4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곳에서는 신시가지 조성공사 때 구석기 유적지가 발견되어 파편들을 수습하기도 하였다. 좌동초등학교 앞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좌동에는 해운팔경중 하나인 장산폭포가 있으며, 위쪽에는 들판이 있었는데, 이를 세칭 장자버들이라고 한다. 이 아래 마을을 장산마을이라고 하며, 또 그 밑으로 세실마을, 좌동마을의 자연마을이 있는데 이것이 좌동의 모태가 되는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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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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