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혁
부산지역은 구석기․신석기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고 있지만, 오늘날의 금정지역에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금정지역의 청동기시대 유적과 유물은 구서동․장전동․금사동․부곡동 등의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인들의 생활이 시작된 곳으로 볼 수 있다.
삼한 및 삼국시대 금정지역은 거칠산국(居漆山國)의 영역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삼국사기』권34, 지리지에 의하면, “동래군은 본래 거칠산국 이었는데 경덕왕 때 동래군으로 고쳐 지금도 이를 따르고 있다. 영현이 둘이다”라고 하고 있다. 한편,『삼국지』위지 동이전(東夷傳) 변진전(弁辰傳)에는 삼한시대 24개의 국명 중에 ‘독로국’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동래라는 설도 있다. 동래지역의 옛 명칭은 거칠산국․장산국․내산국 등으로 달리 불리어졌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지방제도 개편 때 동래군으로 개칭하였다. 따라서 금정지역은 동래에 속해있었다고 추측된다.
고려시대에는『고려사』권57, 지리 2 울주조에 보면, “속현이 둘이 있는데, 동래현과 헌양현이다”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고려사』권57, 지리2 동래현조에서는 “현종 9년(1018)에 본주(울주)에 소속시켰으며 후에 현령을 두었다. 이 현에는 온천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동래는 고려초기에 와서 군에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속현으로 강등되었다.
조선시대 동래는 태조 6년(1397) 동래에 진을 설치하고 병마사가 동래현의 판현사를 겸임하였으며, 세종 5년(1423)에는 병마사를 첨절제사로 개칭하였다. 세종 22년에는 진을 속현인 동평현으로 옮겼다가 이듬해에 다시 환진하였고, 얼마 후 판현사를 현령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후 명종 2년(1547)에는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한편, 효종 6년(1655)에는 경상좌병영 관할 하의 경주진관에 속해 있던 동래진을 단독 진을 설치하여 양산과 기장현까지도 지휘하였다. 영조 15년(1739)에는 부사 구택규(具宅奎)의 건의에 따라 동래읍성과 금정산성의 수성장을 겸임하였다.
조선시대 동래부의 행정체제의 변화는『동래부지(1740)』에 의하면, 7개면 82리 19동의 체제로 당시 금정지역은 동면(신천리․동상동․오륜대리 등 3동 9리), 북면(선동․부곡동․두구리․작장리․소산리․구야리․장전리․산성리)이 속해 있었다. 한편, 일제 침략기인 1910년 부산부가 설치되자 동래는 부산부의 지배를 받았으나, 1914년 군․면 통폐합에 따라 이전 동래부를 부산부와 동래부 일부와 기장군을 동래군으로 편제되었다. 그후 계속적으로 동래군의 영역은 축소되어 1936년에는 서면과 암남리, 1942년에는 동래읍의 전부와 사하면 등의 지역이 부산부에 편입되면서 동래출장소에 편입되었다.
1949년 8월 부산부가 부산시로 개칭되고, 1957년 1월부터 구제의 실시로 부산시 동래구로 행정적으로 편제되었다. 1963년 동래구 북면출장소에 편입되고, 1975년 10월 1일 북면출장소를 동래구에 통합되었다가, 1988년에는 동래구에서 분구하여 금정구가 되었다. 현재의 관할동은 서동․금사동․오륜동․부곡동․장전동․선동․두구동․노포동․청룡동․남산동․구서동․금성동 등이 있다.
금사동
금사동(錦絲洞)은 조선시대 동래군 동상면(東上面)에 속한 지역으로 금사동이란 지명은 보이지 않는다. 일제강점 초기에 자연마을인 금천(錦川)마을과 사천(絲川)마을의 첫 글자를 합하여 금사동이라 하였다『동래군지(1937)』에 의하면, 동래읍 금사리(錦絲里)와 회동리(回東里)를 합한 지역이다.『동래부지(1740)』산천조에 보면, 오늘날 수영강 상류를 사천(絲川)이라 했다. 사천은 기장군 원적산(圓寂山)과 경계의 사배야현(沙背也峴)의 두 곳에서 발원하여 해운포로 유입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고적조에는 "동대(東臺)는 사천가에 있고 바위의 높이가 4∼5장(丈) 가량되고 물이 굽이쳐 돌아 못을 이루어 깊이가 수장(數丈)이나 되며 물고기가 많아 낚시하기에 좋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볼 때 금천(錦川)·사천(絲川)·회천(回川) 등의 마을 이름은 모두 수영강의 지역별 이름이거나 강의 흐름이나 풍치의 특색을 나타내 주는 것으로, 동대(東臺)는 수영강가의 가장 경치 좋은 장소의 하나임을 엿볼 수 있다. 금사동은 법정동으로 광복이후 줄곧 있어왔으나, 행정동인 서동에 속했다가 1985년 서3동이 분동되면서 이 지역은 옛 지명을 찾아 금사동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금천마을, 사천마을, 회천마을, 동대마을이 있었다.
금성동
금성동(金城洞)의 명칭은 금정산성 안의 동네라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금정산성은 사적 215호인 우리나라 최대의 산성이다. 금정산성은 삼국시대 축조된 것이라는 흔적은 있으나, 오늘날의 성은 조선시대에 축성된 성이다. 효종 때 동래부사 임의백(任義伯)이 금정산에 성을 쌓을 것을 건의하였고, 현종 8년(1667) 현종이 통제사 이지형(李枝馨)을 불러 왜구를 방어할 책략을 지시하였다. 그후 숙종 28년(1702)에 경상감사 조태동(趙泰東)이 상계하자 숙종이 동의하면서 축성되기 시작하였다. 조정의 동의를 얻은 조태동은 동래부사 박태항(朴太恒)에게 공사를 주관하도록 하여 숙종 29년(1703)에 축성이 마무리 되었다. 오늘날 금성동은 죽전(竹田)·중리(中里)·공해(公海)의 3개의 자연마을으로 구성되어 있다. 죽전마을은 화살을 만드는 대나무가 많이 생산되어 붙여진 지명이고, 중리마을은 중성문이 있었기 때문에 불리어진 지명이다. 공해마을은 공해란 말이 관아를 뜻하면 산성내의 좌기청, 군기고, 화약고, 내동헌, 별전청 등의 관아가 위치하였던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다. 『동래부지(1740)』에는 산성리로 불리었는데 조선중기에는 북면(北面)에 속하였고, 조선 말에는 양산군 좌이면(左耳面)에 속하기도 하였고, 동래군 서면에 속하기도 하였다. 일제 때도 부산부 좌이면에서 동래군 좌이면으로 다시 1918년에는 동래군 구포면 금성리로 행정관할이 자주 바뀌었다. 금정산성 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금성동이란 이름을 가졌다. 1963년 정부 직할시 승격과 동시에 부산시에 편입되어 부산진구 금성동이라 하였으나, 북부출장소가 설치로 이의 관할하에 두었으며, 1988년 동래구에서 분구로 금정구에 속하게 되었다. 금성동에는 부산지역의 특산물의 하나인 산성막걸리가 아직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휴일에는 금정산성을 찾는 등산객과 가족나들이 장소로 많이 이용한다. 자연마을로는 공해마을, 산성마을, 죽전마을, 중리마을이 있었다.
구서동
구서동(久瑞洞)의 지명유래는 이 지방 토박이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구세(仇世)는 구세동거(仇世同居)에서 따온 말로 중국 당나라의 장공예(張公藝)는 9대가 한 집안에서 살았다는 고사(古事)에서 집안이 화목한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이곳이 바로 그러한 고장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 또한『동래부지(1740)』의 방리조에 보면, 구세리(仇世里)라 기록되어 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구세리와 두실리의 두개 자연마을로 편성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구서(九瑞)·두실(斗實)·금단(琴端)의 3개 자연마을을 합하여 구서리라 칭하였고, 동래군 북면에 속하게 되었다.『동래군지(1937)』에는 구서리(九瑞里)란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래부지(1740)』의 효자효녀조에 나오는 구주성(俱周星)의 성씨를 따서 구세(九世)로 되었다고 하나 이는 실상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나오는 구주성은 구서동의 인물이 아니며, 사상(沙上)에 효자비가 있다. 구서동은 굿을 하는 동네라는 뜻에서 굿판, 굿터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풀이된다. 금정산 번우암은 구성동 위쪽에 있으며, 이곳은 기우소(祈雨所)로 치성을 드리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이곳에서 굿을 자주 벌여 동네 이름이 구세가 되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뜻이 좋은 한자음으로 바꾸어 구서동이 되었다고 한다. 구서동은 한적한 도시 변두리지역 이었으나, 1985년 이후 급격한 도시화로 인하여 아파트 등의 신축으로 구서1,2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구서마을, 금단마을, 두실마을이 있었다.
남산동
남산동(南山洞)의 지명은 조선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줄곧 쓰여진 이름이다.『동래부지(1740)』방리조에도 동래부 북면에 남산리라 하여 "부 관문에서 북으로 18리에 있다"라고 하였고,『동래부읍지(1832)』 『동래군지(1937)』에도 북면의 남산리로 기록되어 있다. 남산동은 남산·남중(南中)·신암(新岩)의 3개 자연마을이 있으며, 남산마을 조금 떨어져 작은 마을로 반남산(半南山) 마을이 있다. 이중 가장 취락이 먼저 발달한 곳이 남산마을로 지세는 북이 높고 남쪽이 낮아 집을 지으면 모두 남쪽으로 향하여 남산이라 하였다 한다. 한편, 남산동은 범어사의 사전(寺田)이 많아 범어사에서 볼 때 남쪽 산등성이라 하여 남산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신암마을은 이 지방사람들이 "서근덤"이라 부르는데 썩돌이 많아서 한자식으로 표기한 것이라 한다. 동래에서는 예부터 이 지방의 물이 좋은 순서를 말하는데, 일(一) 남산, 이(二) 초읍, 삼(三) 연지라 하여 남산의 수질이 으뜸이었으나, 청룡동저수지가 생긴 이후부터는 물이 예전같지 못하다고 한다. 자연마을로는 남산마을, 남중마을, 신암마을이 있었다.
노포동
노포동(老圃洞)의 지명은 농사를 잘 짓는 농부, 또는 농사에 경험이 많은 사람으로 늙은 농부를 뜻한다. 노포동이란 농사가 잘되는 마을, 다른 곳에 비하여 농토가 풍부한 마을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동래부지(1740)』에는 동래부 북면 작장리(鵲掌里)·소산리(蘇山里)에 해당하는 지역이다.『동래군지(1937)』에는 작장리와 소산리의 마을 이름은 보이지 않고, 노포리로 기록되어 있다. 노포동은 노포·작장·대룡(大龍)· 녹동(鹿洞)말의 4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작장마을이 대표적인 마을이었으나, 울산방면으로 도로가 개설되면서 노포마을이 중심마을로 대두되었다. 1984년 발굴된 노포동고분군은 부산지방의 고분군 중 가장 앞선 시기의 유적으로 노포동은 다른 지역보다 앞서 취락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노포동을 말 그대로 오래된 채밭이라 풀이하기도 한다. 1910년 동래부를 부산부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부산부와 동래군으로 조정되면서 동래군 북면 노포리에 속하게 되었다. 1966년 리제(里制)의 폐지로 노포동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두구동
두구동(杜邱洞)은『동래부지(1740)』의 방리조에는 동래부 북면 두구리(豆口里)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후기 이후 두구리(豆口里)의 명칭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하여 두구리(杜邱里)로 명칭이 바뀌었다. 두구동의 명칭에 대해서는 임진왜란이 이전 동래의 읍지(邑地)를 물색할 당시 먼저 초읍동에 들러 산세가 좋고 자리가 음양에 맞다하여 우선 초(抄)해 놓고, 이 보다 더 좋은 데가 없냐하고 다니던 중 두구동의 지세가 뛰어나 은지로 정하려 했으나, 동래읍 (수안동 일대)을 보고는 동으로 학소대(鶴巢臺)와 남으로 대조포란형(大鳥抱卵形)이 서울의 장안과 견줄만하다 하여 이곳을 읍지로 정하였다. 그래서 읍지(邑地)를 초(抄)한 곳을 초읍동이 되었고, 두고 보자고 점찍은 땅은 두구동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물론 호사가들이 지어낸 것으로 생각되나 두구동이 평탄하고 좋았음을 엿볼 수 있는 말이다. 구전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하여 북상 중 유(劉)·조(趙)씨 일가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에 동래군 북면 소속이었으며, 1963년 부산시에 편입되어 동래구 북면출장소 관할하에 있다가 1966년 리제 폐지로 두구동이라 칭하였다. 1975년 동래구 직할동으로 있다가 1988년 금정구가 분구되자 금정구 관할이 되었다. 두구동에는 조리(造里)마을·죽전(竹田)마을·대두(大豆)마을·임석(林石)마을 ·중리(中里)마을·수내마을·송정(送亭)마을 등 7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부곡동
부곡동(釜谷洞)이란 동명의 연혁은 어느 동보다도 오래되었으나, 그 유래를 밝힐 만한 기록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일부에서 고려시대 특수행정구역인 양민과 천민의 집단마을인 향(鄕)·부곡(部曲)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견해가 있지만 위치상의 비정이 곤란하다. 부산지방에는 생천향과 4개의 부곡이 있었다. 그러나 이중 생천향(生川鄕)은 현재의 대연동이고, 고지도부곡(古智道部曲)은 아치섬, 조정부곡(調井部曲)과 형변부곡(兄邊部曲)은 범어사부근, 부산부곡 (釜山部曲)은 자성대 또는 좌천동 부근으로 거리와 위치상으로 보아 그 타당성은 희박하다. 부곡이란 명칭은 가마실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며 부곡동에서 서동으로 넘어가는 산의 모양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부곡동은 동북쪽에 구월산을 등지고 동 일부에 산업도로가 지나고 있다. 특히 기찰은 부곡동의 다른 별칭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동래부지(1740)』관방조에 십휴정(十休亭) 기찰(譏察)마을이 있어 여기에서 연유된 명칭이 아닌가 한다. 부곡동 일부가 1976년 동상1동(현 서1동)에 편입되었으나 인구의 증가가 급격하여 1979년 1월 부곡1,2동으로 분동하였다. 1985년 부곡2동을 부곡2,3동으로 분동하였다. 1982년 법정동의 경계를 조정할 때 부곡동의 일부가 서동으로 편입되었으며, 이때 행정동의 명칭과 경계조정이 있었는데 부곡1동의 일부가 명륜2동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로는 기찰마을, 공수물마을, 금양마을, 부곡마을, 오시게마을이 있었다.
서동
서동(書洞)은 원래 서리(書里)로 불리던 섯골(書谷)마을과 내곡(안골)마을의 두개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내곡은 안마실(안마을)이란 뜻으로 동명으로 부적격하여 서리마을이 동명으로 발전한 것이다. 『동래부지(1740)』의 방리조에 보면 동래부 동상면 서리(書里)로 기록되어 있다. 1942년 동래군이 부산부에 편입됨에 따라 동상면의 중심마을인 서리·금사리·회동리를 합하여 서동이라 하였다. 서동은 1968년 중구 영주동·충무동 등의 고지대 철거민의 정책이주지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으며, 1974년에는 준공업지구 지정으로 농촌 변두리지역에서 도시 공업지역으로 바뀌었다. 서동은 1959년 동상동으로 개칭하였고, 1975년 10월 동상1,2,3동으로 분동, 1978년 동상2동을 동상2,4동으로 분동되었다. 1982년 동명 개정 때 동상동은 영도구의 동삼동과 혼돈이 많았던 까닭에 서동으로 개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섯골마을, 안골마을이 있었다.
선동
선동(仙洞)은 조선시대부터 선동이라 불러졌다.『동래부지(1740)』의 방리조에도 동래부 북면 선동이라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선리(仙里)라고 불리다가 1966년에 선동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동은 두구동의 임석마을과 같이 선돌(立石)이 있어 이를 표지물로 동리 이름이 지어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설뫼"를 입산(立山)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자의 뜻을 취한 것이고, 선돌을 선동이라 한 것은 한자의 음(音)을 취한 것으로 풀이된다. 선동에는 하정(荷亭)·상현(上賢)·하현(下賢)·신현(新賢)·신천(伸川) 등 5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중 하현마을은 1942년 회동수원지의 건설로 사라져 4개의 자연마을만 남아있다. 이중 하정리는 조선시대 소산리(蘇山里)라 하였고, 여기에 역원(驛院)이 있었다. 당시 동래부 관내에는 소산역(하정)과 휴산역(휴산역, 연산동과 수영동 사이)의 2개의 역이 있었다. 『동래부지(1740)』에는 북면 선동이라 하여 동래부에서 15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때는 오히려 선리(仙里)라고 불리어왔으며, 1963년 직할시승격 때 부산시에 편입되어 북면출장소의 관할에 있다가 1966년 리제 폐지로 선동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륜동
오륜동(五倫洞)은『동래부지(1740)』의 고적조에 보면, "오륜대는 동래부의 동쪽 20리의 사천(絲川)에 있었는데 대(臺)에서 4, 5보(步) 가량으로 시내에 임하고 암석이 기이하여 구경할만 하다. 속전(俗傳)을 다 갖춘 까닭에 이 같이 이름지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영조 때까지는 오륜대라는 이름은 대(臺)에 가까이 사는 어떤 사람의 행실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되어있다. 『동래부읍지(1832)』에는 "오륜대는 동래부의 북쪽 15리에 있는데 시내와 바위가 기이하다. 옛날 다섯명의 노인이 지팡이를 꽂고 유상(遊賞)한 까닭에 이로 인하여 이름지어 졌다"고 기록하고 있다.『동래군지(1937)』에는 "오륜이라는 모양은 월륜(月輪)과 같아 내(川)에 잠겨있는데 무릇 다섯군데에 있다. 이 대(臺)는 그 가운데 있으므로 오륜리(五倫里)라고 이름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로 볼 때 오륜리라는 이름은 당시 주자학을 숭상하던 시대에 경승지인 이곳은 처사(處士)들이 은둔과 유상하기 알맞은 곳이므로 높이어 부른 이름인데 그후 풍수지리가들에 의해 더욱 윤색된 것임을 알 수 있다. 1914년 동래군 동면에 속하였다가, 1957년 구제실시로 동래구 오륜동으로, 1988년 금정구 오륜동이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오로리마을, 오륜대마을이 지금도 자연마을 그대로 남아있다.
장전동
장전동(長箭洞)은『동래부지(1740)』는 물론 이후 모든 『읍지』에도 북면 장전리(長箭里)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동(洞)의 형성은 일찍부터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1952년 상리(上里)인 장전마을과 하리(下里)인 소정마을을 합하여 장전동이라 하였다. 장전(長箭)의 유래는 긴 화살이라는 뜻으로 금정산의 성안 죽전마을과 같이 화살대를 만드는 대나무가 많이 생산되어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장전의 전(箭)자는 이대 즉 설대로 이 지방 사투리로는 "서느대"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중부이남과 해안지방에 많은 바구니와 조리 따위를 만들기도 하고 담뱃대나 화살대를 만드는데 쓰이는 것을 말한다. 즉, 장전은『동래부지』의 군기조(軍器條)의 장전(長箭)·편전(片箭) 등을 만드는 곳이거나, 그 원료를 공급하는 곳이라 풀이된다. 장전동은『동래부지(1740)』『동래부읍지(1832)』『동래군지(1937)』에 모두 북면 장전리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1952년 자연마을인 장전마을과 소정마을을 합하여 장전동이라 하였다. 1970년 7월 행정구역 개편으로 장전1,2,3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상리마을, 하리마을이 있었다.
청룡동
청룡동(靑龍洞)은『동래부지(1740)』에는 그 지명이 나타나지 않는다.『경상남도동래군가호안(1904)』에는 청룡동이란 기록이 처음으로 보인다.『동래군지(1937)』에는 동래군 북면 청룡리라 한 것으로 보아 청룡이란 지명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청룡은 이십팔수(二十八宿) 가운데 동방에 있는 일곱성수(星宿)를 총칭하기도 하며 사신(四神)의 하나로 동쪽하늘을 맡은 신을 뜻하기도 한다. 청룡동은 범어사의 동편마을이란 뜻에서 지어진 동명으로 풀이되고 있다. 한편, 동네의 고로(古老)들은 계명봉(鷄鳴峰)이 계룡의 형상으로 산의 중턱에는 계명암이 있고 서단을 마주 대하여 미륵암이 있고, 동단에는 용의 머리가 있다하여 청룡동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한편, 계명봉이 계룡(鷄龍)의 형상으로 산의 중턱에는 계명암이 있고, 서동으로 마주하여 미륵암이 있고, 동쪽에는 용(龍)의 머리가 있다하여 청룡동이란 이름을 지었다 한다. 이곳의 고로(古老)들은 미륵암을 미리암이라 부르며, 현재 항측도 상에도 미리암으로 표기되어 있다. 미리는 우리말로 용을 뜻하며 이를 뒷받침해 준다 한다. 1914년 동래군 북면에 속하였다가, 196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산시에 편입되어 동래구 청룡동으로, 1988년 금정구 청룡동이 되었다. 청룡동의 자연마을은 청룡·용성·신리·상마·하마의 5개가 있었고 최근에는 부산재활용사촌이 형성되어 마을을 이루고 있다.
회동동
회동동(回東洞)은 조선시대 동래군 동상면 지역으로 회동(回東)이란 지명은 없었다. 일제강점기 때 회천(回川)과 동대(東臺)마을을 합하여 회동리(回東里)라 했고, 금천마을 일부와 섯골을 합해서 서리(書里)라 하면서 동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동래부지(1740)』고적조에 보면, "동대(東臺)는 사천(絲川)가에 있고 바위의 높이가 4∼5장(丈) 가량되고 물이 굽이쳐 돌아 못을 이루어 깊이가 수장(數丈)이나 되며 물고기가 많아 낚시하기에 좋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볼 때 금천(錦川)·사천(絲川)·회천(回川) 등의 마을 이름은 모두 수영강의 지역별 이름이거나 강의 흐름이나 풍치의 특색을 나타내 주는 것이며, 동대(東臺)는 가장 경치좋은 장소의 하나임을 엿볼 수 있다. 회동동의 자연마을로는 동대(東臺)마을과 회천마을이 있었으나, 일제시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이 두 마을이 합쳐져 회동(回東)마을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회동동에는 6세기를 전후하여 조성된 회동동 고분군에서 철기와 토기류(土器類)의 발굴로 보아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1959년 법정동인 서동·금사동·회동동을 합병하여 동상동(東上洞)이란 행정동으로 개칭하였고, 인구가 증가됨에 따라 1985년 서동과 금사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금사동은 넓은 면적으로 법정동인 금사동과 회동동의 병합으로, 회동동은 법정동과 행정동이 상이하여 행정업무 수행에 부작용이 많아 회동동은 분동이 절실하다. 자연마을로는 동대마을과 회동마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