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장군
홈페이지 - http://www.gijang.go.kr 바로가기
연혁
기장(機張)이란 명칭은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한자음(漢字音)으로 사용되고 있다. 기장이란 명칭을 사용하기 이전에는 ≪삼국사기≫ 권34, 잡지3 양주 동래군조에 갑화양곡(甲火良谷)에서 기장으로 개명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갑화양곡이라 불리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장은 ≪고려사≫ 권57, 지리2 양주조에 다른 이름으로 차성(車城)이라고도 기록되어 있으므로 차성이라고도 불리어졌음을 알 수 있다.
기장지역에는 몇 개의 고분군이 존재한 것으로 보아 이곳을 둘러싼 고대문화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고분군의 존재로 보아 삼한시대에 기장, 장안, 철마 등지에 일정 규모의 정치집단이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의 정치집단은 하나의 독립된 변한(弁韓) 12국 중의 소국(小國)으로 성장하지는 못했지만, 후에 신라에 의해 갑화양곡현으로 불리어지는 것으로 보아 일정한 정치적 기반을 가진 세력은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정치집단은 동래지역을 중심으로 한 독로국(瀆盧國)과 일정한 정치적 연관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점은 기장현이 후에 경덕왕 때 동래군의 영현으로 편제되는 것을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기장이 갑화양곡현으로 불리어진 시기는 신라가 9주5소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군현제의 실시는 경덕왕 16년 이후의 일이지만, 삼국통일전쟁이 끝난 후 대당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문무왕 후반에 국왕중심의 지배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이전의 ○○○촌이 현으로 재편된다. 따라서 갑화양곡현으로 불리어진 것은 7세기 중후반 정도일 것으로 생각되며, 그 이전에는 갑화양곡촌(혹은 갑화양곡성)으로 불리워졌을 것이다. 이에 따라 이 지역은 삼국통일 후 갑화양곡현이라는 이름으로 소수(少守)나 현령의 지배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경덕왕 때 기장현으로 개칭되면서 동래군의 영현이 되었다. 이때부터는 동래군의 영현으로서 동래군 태수의 지배를 받았을 것이다.
기장현은 고려초기 군현제의 개편과정에서 양주(梁州)에 이속되었다가 현종 9년에 다시 울주에 이속되었다. 양주에 이속되는 시기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태조 23년의 시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한 근거로는 양주가 원래 삽량주(?良州)에서 경덕왕 16년에 량주(良州)로, 고려 태조 24년에 오늘날의 양주(梁州)로 변화된 점을 일정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군현의 명호(名號)개정이 단순한 이름 개정이 아니고 전체 군현제의 재편에서 이루어진 점으로 고려한다면 기장현도 그러한 과정에서 양주로 이속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후에 다시 울주로 이속된 것은 현종 9년 양주와 울주에 방어사(방어사)를 설치하면서 기장의 경우는 지리적으로 해안선을 통해 연결되어 있고 해안방어의 필요에서 기장을 울주에 이속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에 따라 고려초기 기장현은 향리가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고려중후기 이후에는 이전에 속현지역이었던 곳에 대대적으로 감무 등을 파견하여 주현으로 승격시키고 있다. 기장현도 이러한 시기에 감두가 파견되는 주현으로 승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현으로 승격된 시기는 이인로(李仁老)의 아들인 이세황(李世黃)이 쓴 ≪파한집≫의 발문에 보면 '지난번에 사고로 동각(東閣)에서 쫓겨나고 품계가 깎이어 기장현에 좌천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이세황이 기장현의 수령(감무 현령)으로 파견된으로 보여진다. 이로 보아 기장현은 12세기 대대적인 속현의 주현화 과정에서 주현으로 승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점은 또 공민왕 즉위년에 한대순(韓大淳)이 기장현감으로 좌천되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려말기 공양왕 3년에는 기장군이란 이름으로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고려말기에 기장군이 현에서 군으로 승격된 것으로 보인다. 이때 기장에는 왜구의 침랴과 노략질로 인해 지역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고려시대 기장현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3, 기장현 고적조에 의하면 고촌(古村)부곡, 결며(結?)부곡, 사량촌(沙良村)부곡, 사야(沙也)부곡 등의 4개의 부곡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장현에는 금주도(金州道) 소속으로서 기장역이 존재하였다.
조선시대 기장은 군현체제를 개편하는 와중에서도 지방관이 파견되는 지역으로 존재하였는데, 고려후기 기장군에서 조선초기에는 기장현으로 격이 한단계로 낮아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중종 14년(1519) 지방제도의 개편으로 경상도가 낙동강을 기준으로 以東은 좌도, 以西는 우도로 양분되었는데, 기장은 동래와 함께 경상좌도에 소속되었다. 임진왜란 시기에 기장현은 읍성이 쉽게 적에게 함락되자, 이를 이유로 선조 32년(1599) 기장현은 폐지되어 남부지역의 영역은 동래에 이관되고, 그리고 북부지역은 울산의 행정구역으로 편입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장현은 얼마 후인 광해군 9년(1617)에 다시 부활되었다. 이처럼 조선시대 기장은 나름의 지배체제를 정비하는 가운데, 현의 하부 행정구역인 면리제도를 갖추어 나갔다. 초기의 면리제는 방위면체제를 가지나 기장의 경우 그러한 자료는 현재 보이지 않고, 방위면을 다시 분화시킨 면리조직의 형태가 존재하고 있다. ≪輿地圖書≫에 의하면 기장현은 읍내면 동면 상서면 하서면 남면 중북면 등의 6개의 면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18세기 단계의 기장현은 면리제에 입각한 행정체계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선시대 기장현은 군사적인 요충지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장은 두모포진이 설치되기도 하였고, 세조대에는 각도의 내륙에 거진을 설치하고 인근 지역을 익에 분속시키는 가운데 기장을 동래진에 분속시켜 중익을 동래로 하고, 좌익은 기장으로 하며, 우익은 울산으로 삼는 체제의 일원으로 되었다.
일제식민지지배와 동시에 지방제도는 구한말의 제도를 시행하다가 1913년 조선총독부령에 의거, 1914년 3월 경상남도 도령 1호에 따라 기장군은 폐지되어 동래군에 속하게 되고, 그 아래의 8개면은 기장면(읍내면 남면 동면의 일부), 일광면(동면의 일부 중북면의 일부), 장안면(상북면 중북면의 일부), 정관면(상북면의 일부 하서면의 일부), 철마면(상서면 하서면의 일부)으로 개편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 이래의 전통적인 방위면은 사라지고, 일제의 식민지지배책의 일환으로 면이 행정의 하부단위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관할행정구역
기장읍(機張邑), 장안읍(長安邑), 정관읍(鼎冠邑), 일광면(日光面), 철마면(鐵馬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