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기시대
부산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부터인데, 해운대 좌동‧중동‧청사포유적에서 발견된 각종 석기의 존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해운대 구석기 유적에서 발견된 석기는 돌도끼, 찍개, 밀개, 긁개, 돌날 등 각종 뗀석기로, 후기 구석기시대에 해당되는 20,000년 전에서15,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금정구 노포동에서도 구석기 유물이 채집되었다.
신석기시대
8,000년 전에서 7,000년 전 쯤에는 식량자원이 풍부한 해안가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조개무지(패총)‧집자리‧무덤 등을 형성하면서 부산지역의 신석기시대가 시작된다. 영도구 동삼동‧조도‧영선동 패총 등이 이 시기의 대표적 유적인데, 이외에도 해안에 인접한 다대동‧암남동‧범방패총과 낙동강 가까이에 위치한 금곡동 율리 암음유적 등 18개소에 이른다. 신석기인들은 빗살무늬토기‧작살‧낚시바늘‧돌도끼‧조개팔찌 등 다양한 유물을 남겼으며, 일본과의 해상 원거리 요격을 통해 흑요석 등을 교환하였다. 또한 수렵‧어로활동 외에도 조‧기장을 중심으로 하는 원시농경 등의 생산활동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부산지역의 신석기 문화는 신석기 시대 전기에서 말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있다.
청동기시대
지금으로부터 BC 3000년을 전후하여 신석기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청동기시대가 시작되었다. 청동기인들은 농경문화를 가지고 만주를 거쳐 들어와 선주민인 빗살무늬 토기인들을 정복·동화시키면서 오늘날 한국인의 주류를 이루었던 것이다. 부산의 청동기문화는 한반도의 가장 남단이라는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늦게 도착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부산지역의 청동기시대 유적과 유물은 구서동·온천동·장전동·금사동·거제동·사직동·수영동·부곡동·낙민동·대신동·괴정1,2동·감천동 등 전지역에 고루 발견된다. 또한 신석기시대에 비하여 그 유적 수가 훨씬 많고 종류도 다양하며, 위치도 바닷가에서 떨어진 내륙 구릉지대로 옮겨가면서 인구가 증가했고, 생활 및 경제형태 또한 많은 변화를 보였다.
부산지역은 청동기시대 후기(기원전 1,000년 전후)의 유물과 유적만 알려져 있고 초기의 유적과 유물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동삼동 위층유적과 금곡동 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 말기에 이미 초기 청동기시대 문화와 접촉한 흔적이 일부 나타났다. 조도 조개더미에서 출토된 공렬토기와 율리 조개더미에서 출토된 마제석촉이 부산지방에서는 가장 빠른 시기의 것으로 보이며, 청동기 전기는 신석기시대 말기와 연속해서 나타난 것으로 보아도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유적만 발견되지 않았을 뿐 실제는 부산지역의 청동기시대 문화는 단절 없이 존재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조도 패총에서 출토된 점토띠 구연토기, 삼각형 석촉은 후기 한국식 동검과 함께 출토되지만 삼각형 석촉은 곧 소멸되고, 점토띠 구연토기도 단면원형에서 삼각형으로 변화한다. 말기에는 부산과 구주지방 사이에 빈번한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시대의 주민들은 지석묘, 석관묘, 옹관묘 등 여러 가지 형태의 무덤을 사용하였다. 이 가운데서도 지석묘와 석관묘는 비교적 일찍부터 사용하였으나, 옹관묘는 아주 늦게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의 사용과 함께 농경중심의 정착생활과 생산력의 증대, 인구의 증가는 새로운 사회의 형성을 촉진하였다. 부산지역의 청동기문화는 일본의 야요이문화 발생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철기문화 즉 원삼국시대로 계승 발전되어 역사시대를 열게 되었다.
철기시대
철기시대는 기원전 150년 전후부터 대략 300년 간을 말하며, 삼한 또한 삼국시대 초기에 해당한다. 이 무렵 삼국은 아직 강력한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하였으며, 고고학 상으로는 석기와 청동기가
소멸되고 철기 사용이 본격화된 시기이다. 부산지역을 비롯한 우리 나라의 남부지방은 철기문화의 유입이 훨씬 늦어져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비로소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해당되는 유적으로는 조개무지와 고분이 있다. 조개무지는 조도·영선동 조개무지 위층·다대동 조개무지 위층·괴정동·동래 등에 최근까지 남아 있었고, 그 외에 청학동·전포동·범천동·하단동·신평동
등에도 있었으나 도시개발로 오래 전에 소멸되었다. 고분은 오륜대·괴정동·화명동·복천동 고분이 대표적이며, 전기는 앞 시대의 전통을 계승한 석관묘(石棺墓)와 석곽묘(石廓墓)였고, 후기에는 돌을
여러 단으로 쌓아서 만든 수혈식 석관묘와 동래 낙민동에서 나온 옹관묘가 유행하였다. 그 외 금사동에서는 풍화된 암반(岩盤)을 파고 들어가서 시체를 매장한 토광묘(土壙墓)도 발견되었다.
중국『삼국지』의 동이전(東夷傳) 한전(韓傳)에서도 이때의 묘제가 석관묘나 토광묘처럼 간단한 무덤이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특히 다른 지방과 달리 부산 인근의 무덤에서 철기유물이 월등히 많은 사실은, 동래 조개무지에서 발견된 쇠를 제련하는 야철터의 존재와 함께, 이 지방이 옛날부터 철 생산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동래 조개무지의 야철 시설은 부근에 있는 사철을 채집하여 제련한 철은 수영강을 통해 왜(倭)나 낙랑(樂浪)·대방(帶方)에까지 수출하였다.
농구와 무기를 만드는데 사용되었고, 또 화폐처럼 물물교환의 매개물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철은 당시의 사회문화 수준의 척도로서 기능하였음이 틀림없다. 부산지방과 낙동강 하류지방에서 많이 생산된 철은 이들 지방의 농경문화와 전반적인 사회경제를 발전시킨 기반이 되었을 것이며, 또 새로 등장하는 가야문화 발전의 촉진제가 되었다. 이와 같이 부산지역의 삼국시대 문화는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발전한 것이다.
현재 삼국시대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큰 규모의 고분군이 동래 부근인 복천동·연산동·반여동 일대에 밀집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은 부산지방의 삼국시대 문화가 동래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