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혁
부산의 여러 지역에서 구석기와 신석기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고 있지만, 오늘날의 동래지역에서는 현재까지 당시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신석기 문화인들은 청동기문화를 수용하여 점차 그 분포지역을 넓혀 나갔으며, 동래지역의 청동기 유적과 유물은 온천동의 금강공원․사직동․수민동 등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로 보아 동래지역은 청동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동래 낙민동 조개무지에서 발견된 쇠를 제련하는 야철터는, 동래지방이 선사시대 철생산 중심지로서 이곳에서 제련된 철은 멀리 낙랑․대방에까지 수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 동래의 명칭은『삼국사기』권34, 지리지에 의하면, “동래군은 본래 거칠산국이었는데 경덕왕 때 동래군으로 고쳐 지금도 이를 따르고 있다. 영현이 둘이다”라고 하고 있다. 한편,『삼국지』위지 동이전 변진전에는 삼한시대 24개의 국명 중에 ‘독로국(瀆盧國)’이 있는데, 이를 동래라는 설도 있다. 동래의 옛 명칭은 거칠산국․장산국․내산국 등으로 달리 불리어졌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동래는 ‘독로’라는 음에서 독로→동네→동래로 음전되어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지방행정제도를 개편할 때 중국식 한자음으로 고침에 따라 동래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고려사』권57, 지리 2 울주조에는 “속현이 둘이 있는데, 동래현과 헌양현이다”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고려사』권57, 지리2 동래현조에서는 “현종 9(1018)에 본주(울주)에 소속시켰으며 후에 현령을 두었다. 이 현에는 온천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속현이었고, 고려후기 왜구의 침략을 방비하기 위해 경상도도순문사 박위에 의해 동래읍성이 개축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동래는 태조 6년(1397)에 군사상의 요충지로서 이곳에 진을 설치하게 되자, 진의 장수인 병마사가 동래현의 행정관인 판현사를 겸임하였다. 세종 5년(1423) 병마사를 첨절제사로 개편하였다. 그후 명종 2년(1547)에는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선조 25년(1592)에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599년에는 다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효종 6년(1655)에는 경상좌병영 관할하의 경주진관에 속해 있던 동래진을 단독진으로 설치하였다.
동래부의 행정체제의 변화는『동래부지(1740)』에 방리조에는 7개면 82리 19동의 체제로 행정구역이 나누어져 있다.『동래부읍지(1832)』에도 9면체제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832년 이전에 9면체제로 변화되었고,『영남읍지(1895)』에는 9면 131동리로,『경상도동래군가호안(1904)』에는 12면 154동리로 변화되고 있다. 동래지역은 읍내면(안민리․수민동․평남동․안국동․복산동 등 24개동)에 속해있다.
한편, 일제 침략기를 거치면서 부산부가 설치되고, 1914년 군․면 통폐합에 따라 이전 동래부의 일부와 기장군을 합하여 동래군으로 편제되었다. 1936년에는 서면과 암남리, 1942년에는 동래읍의 전부와 사하면 등의 지역이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49년 8월 15일 부산부가 부산시로 개칭되고, 1957년 1월부터 구제의 실시로 동래구로 편제되었다. 1980년에는 일부 지역이 해운대구로 분구되어 나갔고, 1988년에는 금정구가 분구되었고, 그리고 1995년 3월에는 연산동과 거제동이 연제구로 분구되었다. 현재의 관할 동은 수안동․낙민동․복천동․칠산동․명륜동․온천동․사직동․안락동․명장동 등이 있다.
낙민동
낙민동(樂民洞)은 옛 동래의 읍내면지역으로 1914년 평남(平南)·안민(安民)·장남(壯南)·안국(安國)·서호 (西豪)동을 합하여 수안동이, 신락(新樂)·회룡(回龍)을 합하여 낙민동이라 불렀다 낙민동의 명칭에 관한 유래는 문헌상으로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낙민동은 조선시대 남문동변동(南門東邊洞)이라 부르던 지역이다. 이곳은 동래부 수령이 민정을 살피려 나아가는 지역인데, 수령이 백성을 즐겁게 해준다는 뜻에서 낙민동 이라는 명칭으로 고쳤다고 한다. 이 지역은 1960년대만 하더라도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늪지대로 미나리꽝이거나 연밭(蓮田)이었으며, 그 이후 매립되어 집단아파트가 조성되어 주택가로 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낙민동은 법정동으로서 1957년 1월 수안동과 낙민동을 합하여 행정동인 수민동이 탄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조개무지마을이 있었다.
명장동
명장동(鳴藏洞)이라는 명칭은『동래부지(1740)』에 동래부 동면 명장리(鳴壯里)로 표기되었다가 조선후기에는 동상면 명장리(鳴藏里)로 되었다. 1957년 이전까지만 해도 미나리꽝과 야산으로 이루어진 시골의 어느 한적한 마을에 불과하였던 변두리였으나, 1975년 안락북지구 구획정리사업 이후 도시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명장동의 유래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없고 다만 인근의 염창리(廉倉里)와 같이 명편(鳴鞭)을 간수했던 곳에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명편은 옛날 의장(儀仗) 때 쓰는 기구의 하나로 이를 흔들어 소리를 내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정숙하게 하는 물건으로 일명 정편(靜鞭)이라고도 한다. 동래부사는 동래 독진을 지휘하여 동래뿐만 아니라 인근의 양산·기장의 군사까지 지휘하였는데, 이때 사용하던 명편을 이곳에 간수케 하였다 하여 명장(鳴藏)이라 전한다. 명장동은 1910년 동래부 동래읍에 속했다가, 1959년 부산시 동래구 명장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1980년에 들어서기 시작한 아파트와 학교의 설립으로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1990년 1월 명장1,2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개구리마을, 명장마을, 북문밖동네마을이 있었다.
명륜동
명륜동(明倫洞)은『동래부지(1740)』의 방리조에 보면, 신향교동(新鄕校洞)이라 하였다. 조선시대는 고을마다 향교가 있어 그 향교가 있는 마을을 교동(校洞) 또는 교리(校里)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동래도 조선초기 향교가 있는 마을을 교동이라 했는데 향교가 여러차례 자리를 옮겨 앉게 되자 구교동, 신교동이란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다. 한편, 이 일대는 예부터 대낫들이라 불렀는데, 이는 옛 명륜동에서 온천장으로 가는 길이다. 옛날에 동래부사가 부임해 올 때나 전임되어 갈 때에 이곳에서 이속, 군졸과 육방관속들이 환송 및 환영식을 거행하였는데, 기지창검의 늠름한 행렬이 자못 장엄하여 "큰 나들이"라 한 것에서 "큰" 이 "대"로 바뀌어 "대낫들이"로 불린 명칭이다. 이를 일명 개복장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지금의 명륜동은 신향교동이라 하다가 1906년 교동이 되었다. 그 교동이 구교동과 헛갈려 향교의 중심인 명륜당을 따서 1942년 명륜동이라 이름을 고쳤다. 1978년 명륜1,2동으로 분동하였다. 이후 인구 감소로 명륜1,2동을 통합하였다. 자연마을로는 교리 대낫드리마을, 못안골마을, 사싯골마을, 화장골마을, 삼성대마을이 있었다.
복천동
복천동(福泉洞)의 유래는『동래부지(1740)』성곽조에 의하면, 동래읍성 안에는 우물이 6개가 된다고 하였고, 각면각리원근정도 (各面各里遠近程道)조에는 읍내면에 옥미정동(玉未井洞)·대정동(大井洞) ·야정동(野井洞) 등의 우물과 관련된 이름이 있다. 이로 보아 복천동을 동래성안의 우물에 비유하는 뜻에서 파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전근대사회의 우물은 양반댁에서나 볼 수 있으므로 우물이 있다는 것은 복이 넘치는 샘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뜻에서 옥샘(玉井)은 물의 맛이 좋기로 소문난 우물이었으므로 복천동은 이러한 것에서 붙여져 전해 내려왔을 것이다. 특히 복천동은 복천동 고분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고분은 삼국시대 때 이 지역 수장급의 무덤으로 그 문화의 번성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 예부터 생활근거지였음을 알 수 있다. 법정동인 복천동과 칠산동은 1957년 시 조례에 의해 병합하여 행정동인 복산동으로 개칭하여 모든 행정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담뱃대마을, 도화동마을, 광성리가 있었다.
수안동
수안동(壽安洞)은 옛 동래의 읍내면지역으로, 1914년 평남(平南)·안민(安民)·장남(壯南)·안국(安國)·서호(西豪)동을 합하여 수안동이 되고, 신락(新樂)·회룡(回龍)을 합하여 낙민동이라 불렀다 이 지역은 예부터 동래부사가 집무하던 동헌이 있었던 곳으로 사실상 동래의 중심지이다. 수안동의 명칭에 대한 유래는 문헌상으로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수안동 동래 토박이들에 의해 수안(首安)·수안(水安)으로 쓰여지고 있다. 수안동을 수안(首安)이라고 한 것은 동래부의 수장이던 동래부사가 집무하던 동헌이 이곳에 자리잡고 있어 가장 으뜸 되는 관아 안이라는 뜻에서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 수안(水安)동으로 불렀다는 설도 있는데, 그것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는 땅 밑을 조금만 파내려 가면 물이 나오는 등 물이 흔해 칭해진 이름인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이곳에 동래읍성의 수문이 있었고 수문안의 동네라고 풀이하는 사람도 있다. 이 지역은 1960대만 하더라도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늪지대인 미나리꽝이었으나 지금은 매축되어 주택가로 변하였고, 동래지역 행정관서가 밀집되어 있다. 법정동인 수안동과 낙민동은 1957년 시 조례에 의해 병합되어 행정동인 수민동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직동
사직동(社稷洞)에는 17세기부터 동래부의 사직단이 있었던 곳이다. 사직의 사(社)는 토신이고, 직(稷)은 곡물을 다스리는 신으로 임금을 비롯한 지방 수령이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 제사를 올려 나라와 지방의 풍요와 안녕을 빌었다. 조선시대에는 서면 여고리·석사리의 2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일제시대 석사리(石寺里)라는 이름은 석사(石社)로 바뀌었다. 1916년 이곳에 있는 사직단의 이름을 따서 사직동으로 불리었으며, 갯밭 (현 신정시장 일대), 딧밭(현 동래정보여고 부근으로 논과 밭이 있어 농사를 짓던 옛 마을의 이름) 등 신촌·칠층대 등의 자연마을도 있었다. 이 사직단은 일제 강점기 일제가 민족혼을 일깨운다 하여 일체의 제사를 금했다. 1960년대 이전에는 논밭과 미나리꽝이었던 것이 1967년 구획정리사업으로 아파트가 들어섬에 따라 1979년 시조례에 의해 사직1,2동으로 분동되고, 같은 해 8월 사직3동이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거인동마을, 건너각단, 돌짝골마을, 딧밭등마을, 새마을, 석사마을, 아랫각단, 웃각단, 여고마을, 칠층대망리 있었다.
안락동
안락동(安樂洞)은『동래부지(1740)』방리조에 보면, 동래부 읍내면 동부에 속했던 효현리(狐峴里)·충렬사리(忠烈祠里)·안락리(安樂里)· 염창리(廉倉里)·구향교동(舊鄕校洞) 등을 포함하는 민가가 밀집한 지역이었다. 조선후기에 들어 염창(廉倉)은 염창(鹽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염창은 현 충렬사와 동래고등학교 사이에 있었던 조그만 마을로, 옛 수영이나 명장지역은 염전이 있어서 여기서 나는 소금을 보관한 창고가 많아서 불렀다. 충렬사리와 안락리는 서원마을로 바뀌어 호현(狐峴)·화현(華峴) 등 4개 마을을 합해 원리(院里)라 하였다. 원리란 서원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임진왜란 때 부산지방을 지키다 순절한 송상현 부사, 정발 장군 등을 모신 안락서원(安樂書院)이 마을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서원(書院)이란 선현에 제사 드리는 사당과 선현의 뜻을 이어받아 가리키는 서재가의 기능을 합한 곳이다. 충렬사는 본래 사당만이 지어져 사액을 받은 것인데 뒤에 송상현공, 정발장군 등 학덕을 본 받을 만 하다하여 강당인 소줄당(昭茁堂)과 동·서재(東·西齋)를 지음으로 서원으로 발전하였다. 즉 충렬사란 사당에 학교기능을 가진 소줄당이 더해짐으로써 서원이 되자 마을 이름도 원리로 바뀌었다. 1942년 서원의 명칭인 안락을 따서 안락정(安樂町)이 되었다가 1947년 일제식 동명 개칭으로 안락동이 되었다. 1982년 인구의 급격한 증가에 따라 안락1,2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서원마을, 염창마을, 원리, 호현마을, 화현마을이 있었다.
온천동
조선시대 온천동(溫泉洞)에는 온정원(溫井院)이라는 원(院 : 국가의 행정업무를 수행하는 관리를 위해 역과 역사이에 설치하였던 관용의 여관)이 있었을 뿐 다른 마을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이곳은 동래부 서면(西面)의 산저리(山底里)가 일부 차지하였고, 다른 일부는 북면의 장전리(長箭里)로 호수가 30여호에 불과하여 하나의 행정단위의 동리는 되지 못했다. 조선시대 동래부에서 온천시설을 갖춘 바도 있었지만 대중성이나 영리성을 띄지 못했다. 동래온천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일제강점 이후 일본인들이 밀려들어오면서 영리를 목적으로 한 온천시설 확장과 여관 등 위락시설이 본격적으로 갖추어지면서부터다. 일제 강점한 초기인 1910년 산저리와 장전리 일부를 합하여 온천리(溫泉里)라는 행정단위의 동리명이 생기게 되었고, 미남리도 포함하게 되었다.『동래군지 (1937)』에 의하면, 온천동은 동래군 동래읍의 온천리로 기록되어있다. 1942년 부산부 동래출장소 설치로 온정리라 하였다. 1947년 7월 일제식 동명 개정 때 선저·미남정이라 불리던 미남리와 산저리 일부를 합쳐서 온천2동으로 개칭하였다. 1979년 온천2동을 온천2,3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금산리, 달북마을, 마암마을, 미남마을, 산저마을, 온천마을, 포전마을, 화촌마을이 있었다.
칠산동
칠산동(漆山洞)은 삼국시대 동래지역에 거칠산국(居漆山國)이 존재하여 있었는데, 이를 신라가 병합하여 거칠산군(居漆山郡)이라 하였다가 통일신라 이후 경덕왕 때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동래군(東萊郡)으로 바뀌었다. 거칠산은 "거칠다"의 우리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거침 뫼" 즉 황령산(荒嶺山)을 지칭하는 것으로 풀이되어진다. 삼한시대 소국의 치소(治所)가 동래지역으로 옮겨질 때 주산(主山)의 이름을 칠산(漆山)이라 불렀을 것이다. 이러한 내력과 오늘날의 동래읍성이 있는 뒷산을 칠산이라 부른데서 연유한 것으로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복천동고분군으로 널리 알려져 삼한시대의 가야문화가 발생하였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칠산동은 1957년 시 조례에 의해 법정동인 복천동과 합하여 하나의 행정동인 복산동(福山洞)으로 개칭하여 모든 행정업무를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