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 부산은 여러 가지 산적한 현안을 안고 있었다. 부산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철수, 해외동포의 귀국, 일제잔재의 청산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도 전에 남과 북을 미소가 분할 점령하여 남한은 미군정의 실시로 부산에 미군이 주둔하여 군정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미군정 당국의 행정체계는 일제강점기 행정체계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이후 1947년 10월에는 일본식 동명을 우리말로 바꾸어 동명의 기본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면서, 부산은 새로운 행정체제 속에서 민주적 법치행정의 실시를 추진하였다. 1949년 8월 15일 부제(府制)가 시제(市制)로 개칭되어 비로소 부산시가 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정부 부처의 부산 이전으로 부산이 임시수도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또 다른 시련을 겪었으나, 그 와중에서도 1951년 9월에는 중부, 서부, 영도, 부산진, 초량, 동래출장소 등 6개 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53년에는 대연출장소가 부산진출장소(1936년 설치)에서 분리 설치되었고, 해운대출장소도 수영출장소에서 분리되어 출장소는 8개로 늘어났다. 1957년 1월 1일 구제(區制)가 실시되어 6개구(중구, 동구, 서구, 영도구, 부산진구, 동래구)가 설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