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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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부산지역의 선사유적은 최근에 해운대 신시가지 조성지역에서 새로 알려진 좌동과 청사포 일대에서 구석기유적이 발견되었다. 특히 신석기유적은 동삼동, 다대동 등의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부산진구지역에서는 이와 같은 유적지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신석기시대 이전에 사람이 거주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초기철기시대의 유적의 분포양상도 청동기의 유적 분포와 비슷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사람이 점차 해안지대에서 내륙 구릉지대로 이동하여 거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산진구지역에서 초기철기시대의 유적이 동평현(현 당감동)지역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철기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였다고 할 수 있다.
삼한, 삼국시대의 진구지역은 변한의 소국의 하나인, 거칠산국에 편입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거칠산국이 『삼국사기』권44, 거도전에 의하면, "석탈해왕때 신라에 병합되었다"고 하고 있으므로 오늘날의 진구지역도 신라에 의해 새로운 행정구역으로 편제되었다. 『삼국사기』권34, 지리1 동평현조에 의하면, "동평현은 본래 대증현이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 그대로 쓰고 있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볼 때 일찍이 신라에 정복당한 후 대증현으로 편제되었다. 그것은 당감동고분군에서 발견된 5 ∼ 6세기의 유물들이 신라유물의 영향을 받았던 것을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신라는 경덕왕 16년(757)에 거칠산군을 동래군으로 변경하였는데, 이때 대증현도 동평현으로 개칭되었다. 이 시기 동평현은 동래군의 속현 이었기 때문에 지방관은 파견되지 않았다.
고려시대에는 동평현의 영현이었던 동래군이 동래현으로 강등되면서 울주군에 영속 되자, 동평현도 양주군에 속했다. 동래군은 고려후기에 다시 지방관이 파견되었으나 동평현은 계속 양주군의 지배를 받았다. 고려후기에는 각 지역에 존재하는 성을 축성, 정비하였는데, 동평성도 이때 수축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에 는 고려말부터 왜구의 침략이 계속되자 동래현을 동래군으로 다시 승격시켜 양주에 속했던 동평현은 동래군에 소속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도 얼마되지 않아 태종 9년(1409)에 다시 양주에 영속 되었다가 세종 10년 (1428)에 동래현의 속현이 되었다. 명종 2년(1547)에는 동평현은 동평면으로 개칭하여 동래부에 속하게 되었다.
일제시기 초 1914년 동래부를 부산부와 동래부 일부에 기장군을 편입하여 동래군으로 나누었다. 진구지역은 동래군에 편입되었다가 1936년 부산진출장소(초읍, 연지, 범전, 부전, 양정, 전포, 부암, 당감, 가야, 개금동)가 설치됨으로써 부산부에 속하 게 되었다. 또한 1938년에는 동래군의 구포읍과 사상면이 부산시에 편입되어 부산진구의 관할 사상출장소와 구포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8년에는 부산진구 북부출장소 관할구역이 북구로 승격하여 분리되었다. 현재 부산진구의 관할동은 가야동, 개금동, 당감동, 범천동, 부암동, 부전동, 양정동, 연지동, 전포동, 초읍동 등이있다.
관할행정구역
부전제1동(釜田第1洞), 부전제2동(釜田第2洞), 연지동(蓮池洞), 초읍동(草邑洞), 양정제1동(楊亭第1洞), 양정제2동(楊亭第2洞), 전포제1동(田浦第1洞), 전포제2동(田浦第2洞), 부암제1동(釜岩第1洞), 부암제3동(釜岩第3洞), 당감제1동(堂甘第1洞), 당감제2동(堂甘第2洞), 당감제4동(堂甘第4洞), 가야제1동(伽倻第1洞), 가야제2동(伽倻第2洞), 개금제1동(開琴第1洞), 개금제2동(開琴第2洞), 개금제3동(開琴第3洞), 범천제1동(凡川第1洞), 범천제2동(凡川第2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