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은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아 온 흔적이 있는 곳으로서 삼국시대부터는 행정구역으로 설정될 정도의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이다. 고려시대에는 각 마을에 설치된 사숙서재(私塾書齋)를 통하여, 조선 시대에는 동래향교, 기장향교, 안락서원 등을 중심으로 학교교육의 기반을 다졌으며, 그 이후 곳곳에 세워진 서당을 중심으로 개화기까지의 교육이 이루어져 지역 및 국가의 발전에 앞장섰던 동량들을 배출해 왔다.
2) 光復 以前의 釜山敎育
개항 이후 밀어닥친 외래문화의 유입과 함께 개화에 대한 열망이 고조되었고, 아울러 자주·자강정신의 고양으로 여러 곳에 근대적인 학교가 설립되었다.
부산 최초의 근대식 학교는 1895년 좌천동에 설립된 부산진일신여학교와 부산개성학교인데, 이 두 학교가 오늘의 동래여자중·고등학교, 부산상업고등학교, 개성중학교, 봉래초등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초등교육 기관으로서 부산공립소학교, 초량심상학교 등이 설치되었고, 중등학교는 일본인 학교와 조선인 학교로 구분하여 이원적으로 설치되었으나 조선인 학교는 실업계 학교가 대부분이었다.
3) 光復 以後의 釜山敎育
① 정부 수립기의 부산교육
광복을 맞이하자 부산교육은 조국의 새 일꾼이 될 인재 양성과 식민지 교육의 잔재를 하루 빨리 불식하고 새로운 우리 교육체제를 수립하는 일에 앞장서야 했으며, 해외로부터 귀국하는 많은 동포의 교육을 담당할 방안 수립이 시급했다.
1946년 경남중학교에 경상남도 초·중등교원양성소, 부산수산대학에 부산중등교원양성소를 설치하여 교사를 충원해야 했으며, 같은 해 부산공업중학교를 임시교사로 개교한 부산사범학교의 학생들을 조기 졸업시켜 초등학교 교사로 배치하고, 준교사를 채용하는 등 교원 부족 문제 해결을 위해 집중 노력하는 한편, 교육과정을 개정하고 교육시설을 확충하기 위한 여러가지 정책을 시행하였다.
② 6·25전쟁과 부산교육
6·25전쟁으로 부산은 임시수도가 되어 거의 모든 학교는 군에 징발되었고, 교직원과 학생들 중에서 징집이나 자원 입대, 또는 생활난으로 전직, 취업, 부업 종사자가 많이 생겨 학교교육은 큰 시련을 겪었다.
1952년 2월 26일『전시하교육특별조치요강』이 발표되어 천막교사나 창고 등을 빌려 수업을 전개할 수 있었으며, 서울서 피난 온 29개 공·사립 중등학교의 천막학교 개교로 인하여 부산의 학교는 양적 팽창을 거듭했다. 전쟁 발발 당시 35개교에 불과하던 초등학교가 1960년에는 50개교로 늘어났으며, 21개교이던 중학교는 42개교로, 14개교이던 고등학교는 36개교로 늘어날 정도였다. 휴전이 되어 징발되었던 교사가 복귀함에 따라 학교시설 정비와 급증하는 취학 학생의 수용에 힘썼고, 교육의 내실을 꾀하는 동시에 전란으로 인한 사회적·도덕적 혼란을 바로 잡기 위해 학생 생활지도에 주력하였다.
③ 1960년대의 부산교육
1960년대는 1963년 1월 1일 부산직할시 승격에 따른 행정구역의 확장으로 부산지역 발전과 함께 부산교육의 발전이 기대되는 시기였다. 1963년 11월 1일 교육법 개정에 따라 교육자치제가 부활되었고, 1964년 1월 1일 교육위원 5명이 임명됨으로써 부산직할시교육위원회의 역사적 발족이 이루어졌다. 1968년 12월 5일에는 국민교육헌장이 제정·공포됨으로써 교육의 권위와 질적 향상에 눈을 돌리는 동시에 부산교육의 목표와 교육내용, 교육제도의 정비에 주력하였다.
④ 1970년대의 부산교육
1970년대는 경제개발 정책이 차츰 성과를 나타내어 국민소득은 늘어나게 되었으나 사치와 낭비, 배금주의와 물질주의의 팽배로 ‘국적 있는 교육’을 강조한 시기였다.
1970년에는 중학입시제가 폐지되어 무시험추첨제로 전환되었고, 1973년에는 서부교육구청과 동부교육구청을 신설하였다. 이어 1974년에는 고등학교 평준화가 실시되었으며 부산공예고와 원예학교, 지체부자유아와 정신지체아를 위한 부산혜성학교를 설립하였다. 한편, 체육특기자 육성을 위하여 1973년에 부산체육중학교를 설립하였는데 1975년에 부산체육고등학교로 승격되었다.
⑤ 1980년대의 부산교육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1980년 7월 30일 교육개혁 조치에 따라 과외수업 금지, 대학의 졸업정원제, 교육과정의 개편이 이루어졌다. 더불어 교복과 두발의 자유화 및 학원의 자율화도 추진되었다.
또한 '88올림픽을 계기로 질서의식 함양, 민주시민 양성교육 등이 중점적으로 추진되었고, 이를 계기로 국제적 지위가 향상되어 2000년대의 선진조국을 바라보면서 자주적이고 창의적인 국민을 육성하고자 노력하였다.
1981년 2월 28일에는 남부교육구청을 개청하였고, 1987년에는 교원연수원, 학생과학관, 동래교육구청을 개청하였다. 그 해 11월 26일에는 동구 범일동 소재의 교육위원회 청사를 현 위치인 부산진구 양정1동 455번지로 신축 이전하였다.
⑥ 1990년대의 부산교육
1995년 1월 1일 직할시가 광역시로 개칭되고,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시역이 늘어났다. 학교수가 증가함에 따라 광역시 시대에 걸맞는 양적인 팽창과 아울러 질적인 교육발전과 창의적 인간을 육성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90년대는 부산교육의 교육자치 기반이 확립되고 활성화된 시기였다.
1991년 3월 26일자로 교육위원회가 합의제 집행기관에서 의결기관으로, 교육감은 독임제 집행기관으로 분리됨에 따라 제1대 교육위원 12명이 1991년 9월 2일부터 1995년 9월 1일까지 활동한 이래 4년 임기로 제2대에는 16명, 제3대와 제4대에는 11명의 교육위원이 활동해 오고 있다.
1995년 3월 1일 초대 민선교육감으로 정순택 교육감이 선출된 후 민선 2대인 제11대 교육감 재임 2년 차인 2000년까지 ‘21세기를 주도할 민주시민 육성’을 교육지표로 설정하면서 교육개혁과제의 지속적 추진으로 21세기를 대비한 ‘열린교육사회·평생학습사회’의 신교육체제 구축을 위해 애써 왔다. 민선교육감 시대에 들어 부산교육은 시대 흐름에 부합하는 변화와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교육부 주관 시·도교육청 종합평가에서 3년 연속 1위를 차지하는 등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아울러, 1996년 3월에는 북부교육청, 해운대교육청을 개청함으로써 6개 지역교육청이 되어 부산교육이 행정구역과 균형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연계체제를 갖게 되었다.
⑦ 2000년대 진입기의 부산교육
2000년 10월 9일에 제12대 설동근 교육감이 취임하면서 밝힌 정책의지는 첫째, 20세기를 마감하고 새 천년의 세기를 맞이하는 시기인 점을 감안하여 기존의 교육정책 기조를 유지하되 시대적 요청에 맞게 계승·발전시켜 나가고, 둘째, 교원의 이해와 참여 속에 교단중심의 지속적인 교육개혁을 추진하며, 셋째, 봉사하고 협동하는 평생학습사회인으로서 개인의 창의력과 다양성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하며, 넷째, 학교가 즐겁고 교사는 보람을 느끼며 학생과 학부모가 모두 만족하는 교육풍토를 조성해 나가는 것이다.
2000년대 초반 부산교육의 지향은 21세기 지식기반사회에서 인성과 창의력이 교육의 핵심이 된다는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 이에 따라 부산교육에서는 ‘인간존중의 기초·기본교육 충실, 지식기반사회를 이끌 인적자원 개발, 교단지원 중심의 질 높은 교육행정 구현’을 3대 중점시책으로 설정하고 있다.
제7차 교육과정의 운영을 내실화하는 가운데 학생들의 학력을 신장시키기 위해 기초생활습관 지도와 독서교육을 강화하며, 기초학력 부진학생 책임지도제를 실시하고, 학력진단 평가를 강화하고 있다. 또한 교권 경시 풍조를 불식하고 교사가 존경받으며 마음놓고 학생 교육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고 교사의 교육활동을 최대한 지원하기 위하여 교원업무 경감, 교원 자율연수기회 확대, 범시민 스승존경운동 등을 주도해 나가고 있다.
또한, 과학기술부 및 교육인적자원부가 지정한 ‘과학영재학교’로 부산과학고가 지정되고 국제전문인력 양성기관으로서 국제중·고등학교의 장기발전계획이 수립·추진됨에 따라 명실상부한 전국 영재교육의 거점도시로서 부산의 위상이 정립되고 있다.
아울러, 부산교육정보원이 2002년 2월에 개원하여 부산지역 교육정보화 분야와 인적자원개발 지원 중심센터로서 자리잡게 되었으며, 실업계 고등학교의 교육과정을 산업인력 수요 전망과 특성에 맞게 탄력적으로 운영해 나감으로써 미래사회의 직업세계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등 부산지역 인적자원개발에 앞장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