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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수도 부산

한국전쟁과 부산

피란수도 부산 사진
한국전쟁의 발발과 피란수도 부산

1950년 6월 25일 새벽, 갑작스러운 전쟁에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던 대한민국은 며칠 만에 국토의 절반 이상을 내주고 남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발발 이틀 뒤에 대전(1950.6.27.~7.16.), 대구(1950.7.16~8.17.)를 거쳐 1950년 8월 18일 최종적으로 부산을 피란수도로 결정하였다.

부산이 피란수도가 될 수 있었던 이유
  1. 01정부와 국민안전의 유지

    바다를 접한 대한민국의 동남단이라는 부산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하여 정부기능을 온전히 유지하고 전쟁 중 피란민들을 보호하는 등
    정부기능 유지, 국민안전과 심리적 안정이 필요했다.

  2. 02국제협력과 피란민 구호

    부산은 항구도시로서 여러 국제기관과의 긴밀한 협력의 최적지였다. 한반도의 정치·경제적 문제 해결을 위해 설립된 유엔한국위원회(UNCOK)가 위치하였으며, 지리적으로 유엔과 군사, 외교 등 협력이 용이했기 때문이다. 또한 200만 명에 달하는 유엔군과 5,500만 톤 이상의 군수물자 입항 및 하역작업이 유일하게 가능했던 부산항의 존재도 선택의 핵심 이유였다.

국난 극복과 희망의 공간 부산
  • 정치와 국가 유지의 중심지

    전쟁기간의 대부분을 대한민국의 수도로 기능했던 부산은 정치와 국가 유지의 중심지로서 정치, 외교, 경제, 문화, 교육, 의료, 복지 등 다양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 공공시설 긴급 활용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요인과 국회의원, 문화예술인 등이 부산으로 내려오고 정부의 주요 기관들이 옮겨오면서 원도심과 부산항 일대의 각종 공공시설들을 긴급 활용하였다.

  • 평화, 인권, 자유 실천

    전쟁 위기의 극복을 위해 대한민국에 들어온 국제기구 및 각국 대사관의 활동거점이었으며, 유엔 정신과 평화, 인권, 자유 실천의 장이었다.

  • 문화예술의 중심지

    전쟁 수행에 필요한 군수물자는 물론, 피란민들을 구호하기 위한 유엔국 및 국제원조기구의 구호물자가 부산항으로 들어왔다. 부산항을 통해 유입된 물자를 기반으로 형성된 여러 시장은 피란민들의 삶을 지탱했고, 전국 각지의 문화예술인들이 부산으로 모여들면서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 피란학교 운영

    전시연합대학은 피란 온 대학생의 교육을 담당하였고, 총 80여개의 초·중·고등학교가 해변이나 산과 언덕, 운동장 등에 천막을 치고 피란학교를 운영하였다.

  • 독특한 주거문화 탄생

    부산의 기반시설은 턱없이 부족하여 계속 밀려오는 피란민을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산지와 구릉지에는 부족한 주택을 대신해 가마니집과 판잣집들이 들어서면서 열악한 환경을 극복해나가는 독특한 주거문화가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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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수도 부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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