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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이 싼 똥 윤석열이 똥 싼다 2/6부

내용
국가가 싼 똥은 국가가 치운다 041/240

당일 아침이 되자 대통령 의자는 금빛으로 빛나는 왕좌로 바뀌었고 그곳까지는 붉은 양탄자가 깔렸다. 대통령이 지나갈 때까지는 공구박스도 열지 못하게 했다. 경호실에서 겨울이라 춥다며 석유난로를 틀고는 냄새 난다고 창문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러면 안이 따듯해지겠습니까?” 경호원은 갑작스런 나의 질문에 약간 당황해 하더니 선수인 것을 알고는 각하께서 지나가는 동안 약간의 온기라도 있으라고 그런단다.
그때 무전이 왔다. 입구에 대통령이 도착했으니 경호원들 모두 정문쪽으로 모이라는 내용이다. 난 바로 대통령 왕좌에 앉아 문히(남자)를 불러 사진을 찍어라 했다. 문히와 현맹이가 오더니 대통령 의자에 앉으면 안된다고 난리다. “그러니까 빨리 사진 찍어 내가 언제 대통령 자리에 앉겠냐?” 이렇게 난 왕좌에 앉아 찰라의 대통령이 됐다.
그때 “야! 임마! 너희들 뭐야!”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어디서 갑자기 경호원이 나타나더니 삿대질에 욕질이 장난이 아니다. 문히와 현맹이는 놀라 벌벌 떠는 것 같다. “나, 국가대표인데요. 국가대표가 이 자리 앉으면 안 됩니까?”. “하! 이런 맹랑한 놈이 있나?”, “너 어디서 왔어?”, “사천에서 왔는데요.”, 뭔가 고민을 하더니,
“그래, 저 친구 보이지?” 하며 운동장 끝 쪽을 가르켰다. 그곳에는 무기가 든 것 같은 가방을 들고 있는 경호원이 서 있었다. “저 사람도 사천 사람이야. 바로 옆에 삼천포인가? 같은 곳이지?”, “예”, 무전을 치더니 고향사람 소개시켜 준다며 사천 출신 경호원을 불렀다. 그때 대통령이 도착하여 서로 인사는 못했다.
전두환 대통령과 공식 행사가 있으니 회의실로 모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난 전두환 대통령 임기 7년 동안 선수 생활을 했다. 대통령 임기가 끝나면서 나의 국가대표 생활도 끝났다. 국민의례 등 형식적인 행사가 끝나자 대통령께서 모두 나가라 지시하고 선수들과 이야기 하기를 원했다. 경호실장이 옆에 버티고 서 있자 이도 나가라 했다.
몇 번의 실랑이를 하다가 경호실장 마저 나가자 대통령과 선수 32명만 남았다. 참으로 많은 말씀을 하셨다. “내가 대통령 7년을 하면서 여러 분야의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런데 여러분들 만큼 자랑스럽고 진심인 사람들을 만난 적이 없다. 모두 자기 이익을 위하면서 여러 좋은 말들로 포장해 국가며, 민주주의며, 평등이며 외치지만 여러분들처럼 국가에 진심으로 도움이 되는 사람들은 만난 적이 없다(지금 내 생각도 같다).
그러니 여러분이 진정한 이 나라의 애국자들이다. 진짜 이 나라에 꼭 필요한 사람들은 바로 여러분들 밖에 없다. 그동안 내가 모르고 있다가 이렇게 7년이나 지나서야 여러분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 내가 경호실장까지 내보낸 이유는 이 말을 하고 싶어서다. 나도 대구공고를 나와 여러분들이 이 나라에 얼마나 필요한 사람들인지 잘 안다. 이미 대통령 선거도 끝났고 하니 그 어떤 정치적인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노태우 당선자는 나의 부탁이면 잘 들어 줄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은 이번에 종합 우승만 해라. 그러면 그동안 좀 소홀했던 부분까지 합쳐 내가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주겠다. 전세기를 띄워 세계일주도 시켜주고, 대통령 하사금도 지금 아마 300만원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도 3-4배 그 이상을 주도록 하겠다.”
특히 하사금 부분은 몇 번을 반복하며 강조했다. 대통령께서 마무리를 하면서 그래도 섭섭하다며 관계자를 불러 신라호텔에서 최고의 식사를 할 수 있게 했다. 신라호텔 영빈관의 양식 정식 코스에서 만찬을 했는데 식사 시간이 엄청 길었고 끝나고 돌아와서는 배가 고파 라면을 찾아야 했다. 물론 숙소에서 라면을 끓일 수는 없다.
국가가 싼 똥은 국가가 치운다 042/240

제29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는 1987년에 개최되야 했지만 개최국 호주의 200주년 건국 기념일에 맞추어 국제대회가 1년 늦게 열렸다. 그래서 우리 기수는 1년을 더 고생했다. 초창기는 매년 개최되다가 이후 격년제로 개최됐는데 우리 기수만 3년만에 개최됐다. 그 만큼 우리 기수가 고생했다.
시드니에 도착해 1주일 정도 적응 기간을 가졌다. 당시만 해도 백호주의라하여 외국인이 많지 많았고 멕시코 선수가 방송에 나오자 흑인이 처음으로 국영 방송을 탔다며 떠들었다. 호주에서는 각 나라에 안내원을 붙였는데 우리나라는 호주의 유명 아나운서가 함께했다. 대사관에서 유학생들을 통역으로 붙여 주어 지내는데 별 지장은 없다.
외국 선수들과 축제도 즐기고 여행도 했다. 호주 수상의 별장에 초대 받아 파티도 했다. 우리나라 선수 중에는 요리 직종도 있었는데 이 친구는 밥을 한다고 애를 먹었다. 호주에서 제공되는 쌀로는 밥을 지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몇 차례 시도하여 실패하자 우리는 과일과 베이컨만 먹어야 했다. 입에 맞는 과일이라고는 수박과 메론 밖에 없다.
식사 시간의 긴 테이블 위는 마치 헤리포트 영화에서처럼 엄청난 양의 과일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와! 하며 탄성을 질렀는데 배는 삶아 놨고 다른 과일들은 손이 가지 않았다. 베이컨도 처음 먹어보는 것이라 그렇게 입에 맞지 않았다. 쌀은 얼핏 보면 볶음밥 같았으나 젓가락으로 뜰 수도 없다.
무슨 향신료 같은 것이 곁드러져 한 숟가락도 들지 못했다. 배가 고플 때면 메론과 수박, 포도, 오랜지 주스만 먹으며 여기저기 행사에 끌려 다녔다. 드디어 대회가 시작됐다. 우리 직종은 첫날 20분 정도 바닥 작업을 하는데 약간 중노동이다. 일종의 헤라 작업을 하는데 코피가 터졌다.
이를 지켜보던 호주 대사관 직원이 뉴질랜드 대사관에 긴급 연락하여 김치와 쌀밥 도시락을 공수(空輸) 시켰다. 코피가 터지는 바람에 도착 후 처음으로 제대로된 도시락을 먹을 수 있었다. 우리 동기들은 아나? 그 도시락 나 때문에 먹었다. 암튼 난 가끔 이런 특이한 방법으로 공을 세운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앞에 경기장이 있고 호주 200주년 기념행사와 어우러지는 바람에 관객이 엄청나게 많았다. 대충 수만인지 수십만이지 모를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점심시간에는 그 넓은 광장에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친구 몇 명과 도시락을 받아 마땅히 갈 곳이 없어 화장실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도시락 뚜껑을 열었더니 주변의 많은 백인들이 모두 코를 막고 도망갔다. 난 우리나라 김치 냄새가 그렇게 독한 줄 몰랐다. 마늘을 좀 많이 넣은 겉절이 비슷한 김치 냄새를 맡았는데 무슨 샤넬인 줄 알았다. 주변의 백인은 모두 사라졌지만 그 날의 김치로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 날 만큼 김치가 맛 있었던 적은 이후로도 없다. 자! 이제부터 아주 디테일을 말하고자 한다. 난 내가 왜 은메달을 받았는지 지난 30여년이 지나도록 이해하지 못했다. 아주 섬세한 정치랄까 아니면 전략 같은 것인데 이는 유심히 살필 가치가 있다. 국제 관계는 그냥 실력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아주 작은 디테일도 매우 신중해야 뜻을 이룰 수 있다. 내가 참여한 미술도장은 국내에 없는 분야다. 북유럽 풍의 직종인데 우리와 달리 이들은 세부적인 것까지도 지도자들이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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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나와 함께한 박교수는 서운대 동문들 중 영향력 있는 사람일 뿐이지 디테일을 살피는 능력이 떨어진다.
그전에 맡았던 김교만 서울대 교수는 의외로 디테일을 잘 살피는 사람이다. 김교만 교수의 도면은 형식까지 모두 갖추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하면 초창기 충분히 맡을 자격이 있다. 난 국제대회 실패자로 몇십 년째 악몽에 시달렸지만 고의성이 전혀 없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박대감을 싫어하지 않는다.
박대감은 심사위원이었지만 당시 상황을 지금의 나보다 모를 것이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본다. 이 기록이 언젠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독일 심사위원은 국제대회 선수 출신이다. 반면 박대감은 그냥 국내 유명인일 뿐이다. 영국과 독일 심사위원은 미술도장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
독자들이 도대체 미술도장이 뭔지 궁금해 할 것 같아 간단하게 정리한다. 기능올림픽 초창기 대부분의 직종들은 기계 중심이었다. 즉, 산업화로 가기위한 기술경쟁 정도였다. 그중 미술분야 한 직종이 있었는데 바로 미술도장이다. 물론 공예분야는 석공, 금은세공 등이 있다.
미술도장은 축소된 두 점을 연결하는 직선이나 호가 있으면 이를 5배 정도 확대하여 붓으로 색을 칠하는 것인데 선을 따라 정확히 긋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 치수를 지켜야 한다. 동시에 붓으로 면을 잘 다듬으면 된다. 이런 집합체가 하나의 도면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니 단순히 미대를 나왔다고 알 수 있는 직종이 아니다.
그동안 모두를 경험한 나의 판단으로, 응용미술에서는 석고 뎃생 보다 오히려 가장 필요한 기본 능력 중의 하나라 본다. 물론 나도 디테일로 장난칠 만큼 뛰어난 능력은 없다. 그러니까 박대감의 모든 능력을 파악하고 독일 심사위원이 장난을 친 것인데 박교수는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대회가 끝난 후에 상황 파악이 어느 정도 된 것 같다. 아마 박교수님도 이 글을 읽으면 오히려 많은 것이 이해가 될 것이다. 난 김교만 교수를 보거나 만난 적도 없다. 하지만 박대감은 김교만 교수를 잘 알 것이다. 미술도장이 처음 시작될 때 김교만 교수는 부산기공을 직접 방문하여 지도하는 등 작은 디테일도 놓치지 않았다.
나도 뒤에 여러 차례 문제 출제 등 했지만 나나 박교수님은 김교만 교수의 깊이를 느끼지 못했다. 물론 감히 이런 분들과 나란히 서는 것 자체가 매우 건방진 것도 잘 안다. 하지만 이분들은 또한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를 찍으신 분들이다. 다만 여기서는 내가 전공한 미술도장으로 보자는 것이니 특히 박교수님께서 많은 이해를 해주시길 진심으로 바란다.
난 박교수님 화내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움추려든다. 나도 몰랐고 박교수님도 몰랐지만 우리의 침묵은 후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아 서로 조금 창피하더라도 이를 극복하고자 함이니 박대감의 너그러움을 기대 한다. 우리는 미래를 살아야지 기록에 사는 사람이 되면 안 된다. 뒤에 몇 차례 더 만났는데 이제야 나도 그 행동들이 이해가 된다.
국제대회는 그동안 듣던 것과 다른 것이 많다. 우선 노가다라 할 수 있는 바탕 작업은 거의 되어 있어 별로 할 것이 없다.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이런 노가다 중심으로 훈련 시키는 것을 좋아한다. 이는 무식해서 그렇다. 암튼 국제대회에서는 다듬고 무늬만 낸다. 또한 재료들의 특성이 많이 다르다. 이런 구체적인 것은 그냥 넘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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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를 마무리 하고 확대를 시작하면서 분명히 치수를 확인하고 시작점을 잡았는데 다음 날 확인하니 시작점이 10cm가 잘못되어 있다.
내가 잘못 봤거나 누군가 도면을 바꾸었을 수도 있다. 판단컨대, 후자의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내가 검토한 것은 내 바탕의 기준점이 이상해서가 아니라 어제 봤던 치수와 오늘 본 치수가 다르다는 느낌에서다. 10cm 다른 도면을 두면 선수는 그대로 작업하기 때문에 별 의심을 안 한다.
또한 의심 할 수도 없다. 모두 변명 같지만 대회 기간 동안 이해 못 할 일들이 여럿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결국 주장일 뿐인 것 또한 사실이다. 판사나 검사들은 지금의 글을 읽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결과를 바꾸기에는 충분한 이유다. 법에서는 증거불충분이지만 현실에서는 승패가 완전히 바뀐다.
결과가 바뀐다는 것은 사람의 생사가 갈린다는 말이지만 법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마냥 자랑이다. 아마도 사법고시가 법을 이렇게 망쳐 버린 것 같다. 사건이 많아 그럴 수 밖에 없다는 변명을 하겠지만 변명은 그냥 변명일 뿐이다. 나의 경우 유호근이 처음에 등기 하나만 제대로 해석 했으면 600개의 사건번호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건 1건이면 될 일을 검찰이 600개로 늘려 놓고 마치 세상이 어쩌구 저쩌구하면 진짜 쪽팔리지 않는지 궁금하다? 세상에는 많은 사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검찰 스스로 많은 사건을 만들면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왜 사냐? 대법관과 재판관도 모르는 것을 내가 알겠는가? 경찰이 알겠는가? 그래도 검사는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나만 이상하나?
궁디가 무거워 증거 찾으러 다니는 것이 싫으면 가져다 바친 서류 정도는 검토하는 것이 검찰 아닌가? 암튼 유호근의 변명이 엄청 듣고 싶다. 어이! 유검사! 아직도 목멍구에 밥이 넘어가나? 이러다 이주호처럼 나중에 유검사도 또 내편이라고 우기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위쪽 중심선과 도면을 확인한 후 다시 측정해 보았다.
그랬더니 역시 10cm가 잘못되어 있다. 지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상단까지 40이었던 것 같은데 50이 보이는 것이 뭔가 이상했다. 치수가 다른 도면을 만들어 나에게 주고 내가 기준 선을 긋자 그 날 밤이나 아니면 내가 경기하는 도중에 순간적으로 도면을 바꾸어 버린 것이다. 이후 잘못된 치수를 발견하여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스폰지로 그 부분을 지웠다.
다른 나라 선수들은 못해도 난 그런 것을 아주 잘 한다. 난리가 났다. 한국 선수가 작품을 망쳤단다. 왜냐면 스폰지로 눌러 무늬를 낸 부분이 바탕과 전혀 다른 색으로 나타나 큰 실수를 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다음 날 박대감은 식사를 함께하며 중간 결과를 말했다.
“너 바탕 어떻게 한거야? 분명 잘못되어 있어 독일 친구가 엄청 좋아 했거든. 그런데 오늘 중간 심사하면서 다들 놀랬어. 그 부분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독일 심사위원이 많이 칭찬하더라. 기능은 실수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바로 잡는 것이 중요한데 자네가 바로 잡은 것은 다들 이해를 못하겠다며 거의 만점을 주었어.
그래서 현제 자네가 1등이야” 하며 좋아 했다. 난 그런 것을 아주 잘 한다. 그런데 독일과 영국 등 심사위원들이 그렇게 티 안나게 마무리 한 것을 보고 감탄 한 것 뿐이다. 여기까지는 다들 큰 차이가 나지 않겠지만 그 다음 부터는 대부분 내가 다른 나라 선수들 보다 월등히 잘 한다.
다음 날 박대감이 도면을 한 장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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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나를 은메달로 만들고도 아직 서로 한 번도 이를 말한 적이 없다. 그 도면에는 치수가 5개 정도 나와 있는데 하나가 비스듬히 꼭지점이 아닌 그냥 실선에 놓여 있었다. 도면도 영어처럼 국제 표준이란 것이 있다.
즉, 나 같은 사람이 도면을 그리면 세계 어느 나라에 가져가도 모두 통한다. 러시아나 미국, 중국, 아프리카 등 모두 언어는 달라도 도면으로는 대화가 된다. 산업과 관련 된 분야는 대부분 비슷한 규칙이 있는데 요즘은 전공을 배워 석사, 박사를 받아도 이를 모르는 자들이 참으로 많다. 솔직히 그런 박사는 개나 줘버려라.
김교만 교수의 작품에서는 노력한 흔적이 혁혁히 보인다면 앞으로 이 나라에서 살아갈 식자들에게서는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언젠가 반드시 문제가 될 것이다. 스팩만 엄청난 것은 결국 스스로 소통이 전혀 불가능 한 상태로 고립되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가면 대한민국 석박사만 세계적인 왕따를 당할 수도 있다.
내가 G전자에서 수출을 그렇게 많이 하면서도 한 번도 막히지 않고 일처리를 한 것은 바로 이 능력도 한 몫을 했다. 그래서 난 굳이 소통을 외치지 않아도 미국 뿐만 아니라 남미, 러시아, 중국 등 세계 각국과 자연스럽게 소통이 된다. 돌이켜 보면, 독일 심사위원의 트릭이지만 난 당연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박대감을 불렀다.
“교수님! 이 것은 말이 안 되는데요” 하자 박교수님은 ”넌 나하고 같은 나라 사람이잖아 그러니 궁금한 것이 있으면 나를 부르지 말고 독일 심사위원을 불러. 그러면 저놈이 니 말을 말아 듣겠니? 그럼 내가 오는거야. 알겠어?“ 하곤 가버렸다. 난 바로 다음 확대를 진행해야 하는데 그 부분을 알 수가 없어 독일 심사위원을 불렀다.
도면을 보여주며 문제점을 지적했다. 어쩌면 독일 심사위원은 이렇게 될 것을 이미 알고 사전에 장난을 친 것 같다. 갑자기 도면을 들고 가더니 심사위원들을 모으고 난리가 났다. 아마도 확대 위치를 정한 심사위원들끼리의 비밀인데 박교수가 이것을 나한테 넘겨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박교수님은 그것이 뭘 말하는지도 몰랐는데 그만 문제 유출이 되어 버렸다. 내가 7년 대회 준비를 했고, 9번 공식 대회에 참여 했지만 항상 심사 바로 전에 확대 위치를 결정하지 몇 일 전에 위치를 잡는 경우는 본적이 없다.
그런데 독일 심사윈원은 그 위치를 몇일 전에 함께 토론하여 영어나 독일어로 뭐라하며 박교수에게 넘겼고, 그곳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는 치수를 넣어 놓았다. 그러면 난 당연히 질문을 할 것이고 그러면 문제 유출이 된다. 사실 이러면 측정 치수 위치를 바꿔도 된다. 우리나라였으면 충분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대충이 아니라 대화를 말한다).
그런데 독일 심사위원은 이를 문제 삼았고, 난 그렇게 가져간 도면을 두 번 다시 지보 못했다. 이 독일 심사위원은 13년 뒤 서울에서 다시 한 번 만났는데 내가 이렇게까지 치고 올라 올지 몰랐는지 약간 미안해 하는 얼굴이더라. 심사위원과 선수가 같은 나라 사람이면 그런 측정 위치를 미리 주면 저녘에라도 만나 논의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너무 뻔한 수에 걸려 든 것이다. 박교수는 그 치수가 뭘 의미 하는지도 모르고, 난 이상하니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고, 그러면 일종의 범죄가 성립된다. 아마도 은메달은 내 치수가 만점이 나오지 않은 것을 가지고 독일 심사위원과 협상하여 만들어진 것 같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 직종은 별 것 아닌 것 같은 확대가 여러 의미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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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진짜 조금이지만 가능성이 전혀 없지 않는 것이 하나 있는데 2018년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독일을 2:0으로 이긴 것이 이와 전혀 무관하지 않을 수도 있다.
진짜 믿기 힘들겠지만 여기는 아주 사소한 일들만 기록한 것이 대부분이다. 뒷 쪽은 조금 시끄러울 수 있겠으나 난 어디까지나 국제대회 출신이고 수출 전담으로 세계시장에서 놀던 놈이다. 농담 좀 섞으면 진짜 내가 입만 열면 지구가 들썩들썩한다. 변강쇠 영화 봤나? 그 마지막 장면이 여기저기서 막 연출된다.
난 워낙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하여 선배나 후배들이 모르는 것도 많이 안다. 초기에는 확대의 측정 위치를 알려 주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이 작은 부분도 설명이 어려운데 국제시장을 말하면 이 나라의 누가 듣고, 믿고, 알기나 하려나? 어쩌면 이 나라 누군가 진짜 궁금해 하는 것 역시 난 너무 쉽게 아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아주 한심한 것 하나를 가지고도 진짜 배웠다는 놈 수백, 수천 명이 몰려 다니며 엄청난 돈을 쓰고도 아무 것도 모른다. 진짜 재미난 세상이다. 아무짝에 쓸모 없는 스팩만 있으면서 대단한 척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라에서 뭘 어쩌겠는가?. 이대로 가면 한국은 언젠가 아프리카 조차 무시하는 석박사만 바글바글한 하급 수준으로 떨어진다.
냄비 근성이 강한 이 나라가 어떻게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는지는 몰라도 세상은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국민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휠씬 더 치밀하고 영리하다. 쉬운 것도 못알아 들으면서 소통이 어쩌고 랄지이다. 소통이나 대화는 비슷한 수준에서 사용 가능한 용어다. 그렇다고 내가 똑똑하다는 것은 아니니 오해도 하지마라. 사전도 믿지마라.
생각 없는 들놈이 그냥 편리한데로 정리한 것 뿐이다. 사전은 만능이 아니라 참고용일 뿐이다. 세상의 진리는 쉽게 보이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사전에서 쉽게 찾으면 그게 어디 진리냐? 사전은 용어의 해석 뿐만 아니라 세상의 쓰임도 설명 돼야 한다. 그러니 원뜻이 어쩌구 저쩌구는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
나를 친미놈이라 지보 말고 그냥 도사 정도로 봐라. 도사한테 토 달거야? 일종의 슈퍼그래픽으로 우리는 기능인이기 때문에 큰 치수만 지키면 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기준 치수만 있고 나머지는 삼각스케일로 측정하게 됐다. 이해가 잘 안 될 수도 있지만 오늘날 국영수 중심의 수능이 학생들 평가 기준으로 자리 잡아 가는 것과 비슷한 논리다.
일종의 공정이랄까? 유사한 경우 대부분의 공정이 목적을 잃어 버린다.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부르고, 달리기나 글짓기 혹은 토론도 하고, 시도 쓰고, 프로그램도 짜고, 만들기도 하고, 봉사도 하는 등 감성 중심으로 공부를 하면 공정에 문제가 있어 보이지만 이성 중심의 국영수를 공부하면 공정해 보인다.
사실 국영수는 아무짝에 쓸모도 없다. 친미들놈! 지금의 교육은 정신병자들끼리 지 잘 났다고 노는 꼴이다. 우리는 삼각 스케일을 아주 잘 다룬다. 하지만 꼭지점들이 워낙 많아 모든 점을 맞추기는 어렵다. 국내 대회는 당연히 삼각 스케일로 측정 하지만 국제대회는 지정된 점을 측정 할 경우도 있다.
말 그대로 그때 그때 다르다. 엄밀히 말해 국제대회는 치수가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다. 물론 국내 대회도 비슷하다. 그런데 박교수는 이런 것을 전혀 모르고 문제 유출에 대한 항의를 하자 통역을 불러 문제가 있는 것만 알고 합의를 본 것 같다. 하나가 더 있다. 앞서 말했듯이 사다리 드라이아이스 문제다. 김대중 대통령이 옛 청와대 건물에서 도배를 직접 하신 것은 법도 법이지만 아마도 나를 배우려 그러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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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배는 전체 중 아주 짧은 시간을 차지한다. 타이밍이 절묘한 시간에, 도배를 하려고 사다리에 오르는데 누군가 또 드라이아이스를 뿌려놨다. 난 역시 미끄러졌고 딱 평가전 때의 그 느낌 그대로다. 이번에는 시간을 좀 가지고 사다리 부분을 유심히 살폈다. 전혀 미끄러질 일이 없다.
알루미늄 계단은 돌출이 있어 약간 거칠기 때문에 발이 걸리는 것은 가능해도 미끄러지지는 않는다. 당시 너무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해 할 수가 없어 사다리를 몇 번 다시 밟아 봤는데 그 사다리에서 미끄러지는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알루미늄 사다리를 올라 본 사람이라면 다 안다.
벽지가 일부 찟어졌다. 다시 할 수도 있었지만 전날 박교수가 한 말도 있고 하여 티가 안 나게 처리했다. 이는 적어도 독일 심사위원이 장난 친 것 같지는 않다. 독일 선수는 바로 내 옆자리에서 ‘S’자를 엉망으로 그렸다. 삐뚤삐뚤한 것은 물론이고 약간 누워 있었다.
이 친구는 수시로 내게로 와서 엄지를 치켜 들어 칭찬 하고는 디바이드로 내 것을 그대로 배껴갔다. 워낙 못해서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 친구는 어떤 때는 5분 간격으로 내자리를 왔다 갔다 했다. 그렇다고 이 친구가 드라이아이스를 뿌렸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렇게 형편 없는 친구가 금메달을 따서 내가 더 억울 했는지도 모른다. 이 친구는 무늬도 엉망이고 선은 그을 줄을 몰라 테이프를 붙이고 칠한 후 떼어냈다. 그러니 경계가 지저분하여 이를 칼로 긁고 다시 손보는 식이라 말 그대로 엉망이다. 반면 난 인쇄 한 것처럼 깨끗하게 붓으로 마무리 했다.
5일을 했으니 할 말이 더 많겠지만 결과는 정말이지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대회가 끝나고 심사 결과를 기다리는데 박과장이 찾는다고 하여 임시 본부로 갔다. 사무실로 들어 갔더니 작은 쪽지에 ‘미술도장 은, 금은세공 은’ 이라고 적혀 있었다. 난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다.
차마 말을 못해 그렇게 알려 준 것이 아닌가 해서 나중에 만나 그 때 고마웠다고 했더니 박과장은 그런 사실이 없다고 했다. 내가 서울대학원 들어가기 전까지 역시 공직자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채병태, 금은세공, 나, 또 한 두 명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이들은 전부 금메달을 따지 못한 친구들이다.
그날 밤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며 밤새도록 시드니 시내를 돌아 다녔다. 그 날 저녘에 이런 저런 방법으로 각자의 결과를 통지 받았기 때문에 같은 날 밤은 말 그대로 초상집이다. 아마도 성남이가 가장 크게 울었던 것 같다. 성남이는 아침까지 ‘엉엉’하며 크게 울었다. 저녘에 대사관에서 시드니의 고급 레스토랑에 식사를 준비 했으니 참석하란다.
한인이 운영하는 규모가 큰 가라오케 비슷한 식당이다. 식사를 하면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었는데 변국장이 성남인가 기억은 없지만 나와서 노래를 한 곡 하라고 했다. 노래를 반 정도 부르더니 그만 목놓아 울고 말았다. 나도 눈물이나 참을 수가 없다. 통역 나온 여대생들도 있고 하여 래몰 화장실로 갔다.
그랬더니 대략 6-7칸 정도의 화장실에 모두 들어가 엉엉 울고 있었다. 다시 밖으로 나왔더니 레스토랑 전체가 울음 바다다. 정부 관계자들, 교포들, 대사관 직원들, 통역 나온 대학생들, 금메달 딴 친구들, 못딴 친구들 모두 부등켜 안고 울었다. 초상집도 그런 초상집이 없다. 나중에 금메달 딴 친구 보고 “너는 왜 울었냐?” 물었더니 “몰라” 했다. 어떤 친구들은 무슨 자존심 같은 것이 있는지 애쓰 이 날의 기억을 지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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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는 울지 않았단다. 우리가 그날 그렇게 운 것은 꼭 금메달을 못따서 그런 것만이 아니다. 그럼 왜 울었냐고? 몰라! 그냥 눈물이 엄청 나더라. 얼마를 울자 변국장과 박과장이 빨리 정리하자고 했고 우리는 그날 식사도 못하고 돌아왔다. 아마도 성남이가 노래를 부르다가 울자 누군가 애국가를 불렀고 그래서 전체가 울었던 것 같다.
아니면 아리랑 같기도 하고…, 벌써 36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날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그렇게 우리의 지난 7년은 끝났다. 에디슨은 99%의 노력 어쩌구 저쩌구 했다. 이는 앞으로 이 나라에서 인문학으로 밥 먹고 살려는 사람들에게 주는 팁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많은 분야에 그대로 접목이 가능하여 그 이론 자체가 매우 유용하다.
반면 에디슨의 1%가 어쩌구 하는 말은 문제가 많다. 분야에 따라 이론은 전혀 다르게 작동한다. 선생들이 마치 이것이 무슨 진리인 마냥 무조건 노력하라고 강조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세상에는 절대 노력으로 안 되는 것들이 참으로 많다. 또한 영감이나 창의력으로도 절대로 안 되는 것이 많다. 이는 배운자나 인문학자가 반드시 알아야 할 일이다.
그러니 노력부터 하라고 강조하지 마라. 너무 무식해 보이잖아. 어떤 분야는 절대로 타고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재벌, 모델, 조수미 등과 같은 경우다. 조수미가 대충 노력하여 타고 난 운으로 목멍구에 기름 칠하고 산다는 소린 아니다. 그녀는 열심히 노력하는 세계적인 소프라노지만 무엇보다 타고 난 것이 있다.
성악에 재능이 없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만 성악에 어느 정도 타고 난 사람 역시 아무리 노력해도 조수미처럼 되지 않는다. 이 처럼 각 분야별 천재성과 노력은 다르게 나타난다. 따라서 유명인이 말했다하여 그것이 전 분야에 적용되는 이론이 될 수는 없다.
인문학자는 이론이나 철학이 각 분야에 맞는 기준을 제시 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그러니까 교과서 기준이 아닌 인물로 뽑으라면 이제마가 여기에 속한다. 이제마의 이론은 어쩌면 각 분야에 고르게 접목 가능한 대표적인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인문학을 배우거나 이로 살아온 사람들에게서만 찾으면 안 된다. 그럼 똥이다.
물론 인문학자가 보는 인문학과 나의 시점은 크게 다르다. 나에게 우리나라 인문학은 이미 죽은 학문이다. 다 합쳐봐야 이제마 똥멍구에 붙은 똥 만도 못하다. 난 산 그리고 살아갈 인문학을 말한다. 이제마의 이론은 다양성을 증명하는 좋은 인문학적 예다. 난 이제마 전기나 관련 책도 여럿 읽었다.
너희들이 염려하는 시점이 아닌 다른 시점으로 보라는 취지다. 같은 기준으로 봤을 때 미술도장(장식미술)에 있어서 난 천재다. 노력도 많이 했지만 타고난 것 역시 분명하다. 나이 60이 다되어 공치사하는 것이니 이해해라. 그 끝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한 분야의 한 천재는 그렇게 모든 것을 내려 놓았다. 참! 이 사건으로 긴 텀의 장식미술도 완성했다.
국제대회가 끝난 후, 현충원 등의 일상적인 행사가 끝나고 약간의 대기 시간을 가졌다. 노태우 대통령이 막 취임하여 청와대 가는 시간을 조율 중이라 했다. 얼마 후, 청와대로 가기위해 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모였다. 노태우 대통령 취임 후 청와대에서 하는 첫 공식 행사다.
금메달을 딴 친구들은 다과회 앞쪽에 일종의 지정석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가나다 순으로 빙둘러섰다. 1등만 좋아하는 더러운 세상이 아니다. 난 은메달을 받았지만 금메달 받은 친구들을 존중한다. 그들은 그만큼 고생했고 칭찬받아 마땅하고 사람들이 좋아해 주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니 지정석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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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누군가 금메달 딴 내 친구들 앞에서 코미디라도 그런 소리를 하면 난 매우 싫어 할 것이다.
우리처럼 고생한 사람들은 메달을 따지 못해도 메달 딴 친구들을 보고 비웃거나 폄훼하지 않는다. 그 어떤 경우든 우리는 천구들의 금메달도 내 것처럼 자랑스럽다. 그러니 적어도 내 앞에서는 기능올림픽 출신들 보고 농담이라도 함부로 말하지 마라. 난 이처럼 가는 곳 마다 자랑스러운 동기나 친구들이 많다.
난 가나다 중, 정씨라 제일 끝 쪽에 아버님과 위치해 있었다. 그런데 청와대에서 영빈관으로 들어오는 입구가 끝 번의 자리여서 내가 제일 먼저 대통령을 만나게 됐다. 같은 장면은 대한뉴스를 통해 전국 극장 등에서 방영 됐다. 아버님은 원래 줄 담배 스타일이고 그 잘난 조상 뵐 면목이라 생각해서인지 손을 떠셨다.
참고로 아버지는 나 때문에 청와대를 두 번 다녀갔는데 이를 그렇게 자랑스러워 했다. 평생 말이 없던 분이 이일 후 명절에 내려가면 “동배야! 고맙다. 난 이제 여한이 없다. 너 때문에 조상 뵐 면목이 섰다” 등 그놈의 정도전인지 어떤 조상이 엄청 기쁘 할 것이란다.
이렇다 보니 손을 벌벌 떨고 있는데 대통령께서 들어오시며 제일 먼저 내게로 오셨다. “이게 금메달인가?” 하며 내 메달을 만졌다. 그러자 경호실장이 당황해 하며 “아닙니다. 은메달입니다” 하자 “뭐” 하며 잘 못들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아버지께 다가 오시더니 “아드님이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갑자기 “담배 한 개피만…,” 하며 손을 떨었다. 대통령께서는 취임 후 처음 만난 촌부가 담배 한 개피 달라는 소리를 뭔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고 나도 당황했다. 그러자 더 가까이 오시더니 “뭐라 하셨습니까?” 하며 다시 물으셨다. 대통령께서 자세히 듣기를 원했던 것이다.
“긴장해서 그러니 담배 한 개피만 피우고 싶습니다.” 청와대는 외부 물건이 들어갈 수 없으니 담배가 없다는 뜻으로 한 말 같다. 하지만 대통령께서 알아는 들었는데 아직도 귀를 의심하는 눈치로 경호실장을 불러 다시 물어보라 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경호실장에게 말하자 경호실장이 귓속말로 대통령께 전했다.
그때서야 대통령께서 아버님 말뜻을 이해하시고 크게 웃으셨다. 그리고는 경호실장에게 그 자리서 담배 좀 챙겨드려라 지시하고 가시다가 다시 돌아와 경호실장을 불러 ‘몇 보루 챙겨 주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은 행사를 계속 진행하셨고 경호실장이 오시더니 “지금은 담배가 없으니 나갈 때 문앞에서 몇 보루 드리겠습니다.” 했다.
사실 이날 아버지는 엄청 기대 하고 있었다. 대통령이 주는 담배를 친구들과 나눌 것을 생각하며 들뜨 있었다. 아버님 친구들은 대부분 625 전쟁 참전 용사들이다. 지금은 다 돌아가시고 없다. 난 대통령 하사금 300만원의 3-4배 그 이상이 얼마인지 또한 기대했다. 비록 은메달을 땄지만 그래도 하사금과 담배에 대한 기대는 매우 컸다.
모든 행사를 마쳤는데 노태우 대통령은 무슨 말이 없다. 심지어 훈장 수여식도 그 자리서 하지 않았다. 행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입구에서 담배 챙겨주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버스에 탔는데 아버지는 여전히 담배에 대한 기대로 “동배야! 대통령이 담배 주더냐?” 했다. 난 하사금 생각에 담배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님은 친구들과 나눌 수 있는 봉황 그려진 담배가 더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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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렇게 다음 행사장으로 이동했고 언젠가 둘 다 받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명절에 내려가면 여전히 아버지는 그 담배에 대한 희망을 품고 “동배야! 대통령이 담배 주더냐?” 하며 물었다.
난 대통령 하사금도 받지 못했고, 입상자에게 주어지는 아파트 분양권도 사용하지 못했고, 한국산업은행 대출 특혜도 누리지 못했다. 기능장려법에 의한 영업의 우선 순위에 따라 일반사업체를 다시 설립하여 모든 준비를 완료 했으나 조달청은 입구까지의 길을 문제 삼았다. 이 길은 사천시청이 장난 친 것이다.
사천시청이 축사와 창고를 불법 인허가 행사하지 않았으면 조달청 영업의 우선 순위로 얼마든지 재기(再起) 할 수 있었다. 같은 권리는 국회, 노동부, 한국산업인력공단, 대법원, 청와대, 국민권익위원회 등 공문으로 확인했다. 대법원만 모한 회신을 했으나 청와대 등의 회신을 보냈더니 잘못을 시인하고 나의 주장을 인정하며 조달청을 통하라는 회신을 받았다.
그래서 창원까지 가서 조달청의 보안토큰을 받는 등 모든 준비를 마쳤던 것이다. 그렇게 배원길을 완성하자 국가보안법이 완성되어 다시 추격전이 벌어져 이곳 용산에 터를 잡았다. 하사금은 관례도 있지만 전두환 대통령이 공식석상에서 구두로 몇 번을 강조하여 약속했는데 노태우 대통령이 주지 않았다.
아파트 분양권 등도 같은 소송으로 사용하지 못했고, 기능장려금도 받지 못하고 있다. 기능장려금은 법원 판결이 났는데 아직 행사하지 못해 결국 덩쿨째 국가보안법으로 들어가버렸다. 난 김대중 대통령령에 의한 법적 권리가 있으니 하사금을 씨드머니로 하고 나머지는 모두 강제 집행하라.
하사금은 단순한 돈이 아니라 평생 대를 물려 자랑 할 대한민국 대통령의 약속이다. 난 이 모두를 국가보안법으로 연결한다. 하사금 300만원에 대한 내용은 인쇄된 책자 등도 많고 대통령이 직접 구두로도 약속했다. 약속한 사람이 당나라 대통령이냐? 우리는 선수촌을 나갈 때도 사비로 움직였다.
언제 밖에 나가 바람이나 쐬라며 차비 한 번 준적이 없다. 그러니 이는 국가에 봉사하고 받는 봉급으로 봐도 된다. 대한민국 공무원 중에 7년 봉사료로 300만원 받고 사는 사람이 있나?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이 이 나라의 현실이다. 물론 돈이 좀 있다고 마다 할 이유야 없겠지만 어떤 사람에겐 더욱 절실 할 수가 있다.
혹자는 아주 간절히 혹은 아주 자랑스럽게 약속 받은 것이 대통령 하사금이다. 난 G전자에 소속되어 자랑스럽게 받을 돈이만 지금은 간절하게 받아야 될 대통령과의 약속이 되어 버렸다. 국가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지금은 그 약속이 이 사건의 씨드머니가 된다.
주말도 없고 명절도 없고 가끔은 외출도 없이 구속된 삶에 대한민국이라는 선진국이 봉사료 돈 300만원을 떼어 먹는단 말인가? 이는 그냥 아무 곳에서나 막 쓰버리는 돈 몇 푼이 아니라 국가대표의 긍지다. 이후 김영삼 대통령의 조선총독부 철거 때도 초청 받아 참석했는데 단 한 푼의 차비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 때는 선수 출신의 권리를 담은 기능장려법 공청회에 참석 했는데도 차비 정도는 받았다. 이는 법을 알면 매우 비교되는 상황이다. 다시 말해, 법적 권리장전이 시작된 것이다. 파견나간 G전자에서는 국내 최초의 인덕션 개발, 월풀, 시어스 OTR, 일본 수출향 전자렌지 등 개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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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M은 전 세계 전자렌지 수출 물량의 20% 정도(어쩜 40%)는 내 손을 거쳤을 것으로 예상되며, 이는 전세계 어느 나라의 매장에서나 내 손을 거친 제품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 수출에 크게 기여했다.
보통은 한 모델만 다루어도 이력이 될 만한 일을 난 수 백인지 수 천인지 기억도 못할 정도로 많이 다루어 우리나라에서 전 세계 제품 동향을 가장 잘 파악하는 사람이 됐다. 파견된 직장에 다니며 야학을 했고, 유한대학에서는 야간 과대표도 맡았다. 맛동산 CF 모델 두 명도 과동기였는데 내가 좋아한다며 따라 다니기도 했다.
“맛동산 먹고 즐거운 파티…,” 하면서 맛동산 과자를 들고 제일 앞에 나오는 애들이다. 주간 반은 태강그룹 사위가 과대표였는데 이 친구는 아주 잘 생겼다. 박연카 회장의 외동딸도 같은 과에 같이 다녔다. 박연카 회장은 방송을 많이 타 잘들 알겠지만 그렇게 잘 생긴 얼굴이 아니다. 그러니 딸도 비슷하다.
박연카 회장 딸이 이 친구를 좋아하자 친구 어머니와 진솔하게 대화를 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동안 열심히 살았지만 가난을 이기지는 못했다. 너는 얼굴도 잘 생겼으니 좋은 여자(여쁜 여자?)를 만날 수 있겠지만 너를 희생하여 우리 집안을 살릴 수 있다“ 뭐 이런 대화로 지금의 집사람과 결혼하기로 마음 먹었단다.
중학교 동기인 홍이대 서양학과생 득이와 조소과생 수근이가 찾아왔다. 물론 오랜만에 만나거나 한 것은 아니다. 수근이는 중학교 마치고 처음 만났지만 덕이와 홍이대 다른 친구들은 그동안 줄 곳 만나왔다. 이들이 나보고 미술학원을 하자고 했다. 성신여대역 근처에 그렇게 작지 않은 ‘아트파워’ 라는 미술학원을 차렸다.
운영에 차질이 없을 정도로 처음 부터 수강생들이 많았다. 그래서 운영을 득이에게 맡기고 난 내 일을 했다. 보증금, 석고상, 이젤 등 안에 들어가는 모든 것은 100% 내 돈으로 설립했다. 상금 등 모든 재산을 투자했고 난 작은 월세 방으로 갔지만 사실상 설립자이고 운영자다. 첫 출발이 너무 좋아 별 의심도 하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나자 홍이대 시각디자인과 이선생이 찾아왔다. “원장 선생님! 그동안 밀린 강사료를 주셨으면 합니다.”, “무슨 소립니까? 내가 알기로는 학생들이 상당히 많은 것으로 아는데 왜 강사료가 밀립니까?” 학생이 많아 수익은 좋은데 득이가 그 돈으로 빈씨와 놀러 다니고 선물 사주고하여 자기들 수강료를 주지 않는다고 했다.
당시에 학생 한 명 당 월 15만원 정도를 받았고 학생이 대략 20여명 이상이었으니 단순 계산만 해도 월 3백만원 이상의 수익이 된다. 당시 G전자 대졸이 월 40만원 정도 받았으니 얼마나 큰 돈인지 가늠된다. 알겠다하고 당장의 밀린 강사료를 챙겨 주었다. 얼마 후 불시에 학원을 방문했더니 한 마디로 판개이다.
그래서 남에게 모든 것을 맡기면 안 된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섰다. 바로 그 길로 득이를 짜르고 강사들을 홍이대 서양화과에서 시각디자인과로 바꿨다. 내부 정리도 좀 하고 내가 그곳에서 머물기로 했다. 참 국미대 시각디자인과 선생도 있었는데 사람이 좋았다.
암튼 명문대와 인성이나 리얼 머리는 확실히 별개다. 그렇게 어느 정도 정리 되자 서울대 미생물학과 학생인 득이 동생 영민이가 찾아왔다. “동배형! 정말 미안해요. 득이형이 잘못했는데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영민이는 이미 많은 사실을 나보다 더 잘 알고 미안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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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이는 예술가 아니냐?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을 했고 지금와서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지 않느냐?” 하고 보냈더니 얼마 후 득이가 빼꼼이 찾아와 눈치를 보더니 빈씨와 결혼한단다.
빈씨는 득이 여자친구인데 당시 홍이대 서양학과나 주변의 그림하는 친구들은 다 알 정도로 모두의 연인이다. 그래서 결혼 할 때는 친구들이 밤에 종로거리의 차를 막고 함께 도로 위를 뛰어가며 축하도 해 주었다. 요즘은 상상이 안 되겠지만 그때는 그랬다.
어느 정도 학원이 정상화 되자 홍이대 시디과 이선생 두 명이 왔다. 월급 날 원장이 주로 술을 사니 한 잔 하자고 했다. 그래서 성신여대 앞의 어느 시장 골목으로 갔다. 약간 오르막 길로 올라 가는데 왠 젊은 친구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온 시장을 뒤엎고 있었다. 꼭 영화에 나오는 못된 깡패 같다. 세상에는 법조인이나 정치인 보다 좋은 깡패가 더 많다.
그러자 상인들과 사람들이 이 친구를 피해 모두 길을 터자 주변에 사람이 없다. 그런데 이 친구가 우리 쪽으로 빠르게 접근했다. 바로 내 앞으로 오더니 “야 이끼새야! 내가 누군 줄 알아!” 하며 행패를 부렸다. 그래서 좌우를 둘러 보니 같이 왔던 선생들은 벌써 줄행랑쳤다. 이런 사람들은 뭐든 같이 하면 안 된다.
그 친구가 비틀거리며 주먹 비슷한 것을 내 얼굴 쪽으로 날렸다. 순간 난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어 귀싸데기를 날려 버렸다. 그러자 이 친구는 술이 깨는지 정신을 차리려 안간힘을 쓰더니 “야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승군간대학교 체육학과 학생이야! 한 판 붙자는 거야” 하더니 무슨 운동 기본 동작 같은 것을 취했다.
난 다시 슬리퍼로 있는 힘껏 귀싸데기를 번갈아 갈겨 버렸다. 아무튼 때릴 때는 가능한 있는 힘껏 때리는 것이 맞다. 그러자 이 친구는 모두 도망가는데 자기 어깨도 미치지 못하는 짧고 동글동글한 놈이 귀싸데기를 날리자 상황 판단이 더 안 되는 것 같다.
“이 끼새가 승군간대학교 채육학과생을 때려” 하더니 발을 앞뒤로 빠르게 뛰는 것이 마치 앞차기 비슷한 준비를 하는 것 같다. “야! 너 몇 학번이야?”, “뭐?”, “이 끼새가 너 몇 학번이야? 몇 학번인데 선배도 몰라 봐?” 난 피노키오지만 이렇게 준비된 거짓말은 잘 한다.
갑자기 눈을 끔뻑거리더니 술이 확 깬 것 같다. “너 지금 당장 학교 운동장으로 뛰어가! 빨리!” 난 승대 운동장이 체육학과 근처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난 많은 학교를 가봤지만 승대는 가본 적도 없다. 작은 소리로 “예, 선배님!” 하더니 우물주물 했다. 다시 슬리퍼를 들고,
“당장 뛰어가!” 하고 소리치자 이 친구는 총알보다 빠르게 뛰어갔다. 난 역사를 참 잘 쓴다. 역사학자들! 역사는 이렇게 쓰는거다. 아마도 그날 그는 승대 운동장에서 밤새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얼핏 들으면 좀 구라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나의 모든 이야기는 전부 팩트다.
난 지금 법적인 문제 때문에 사실만을 바탕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꼭 소설 같이 흘러가는 것 같아 나도 좀 이상 하기는 하다. 이런 것을 파란만장이라 부르는 것 아닐까? 그런데 사실은 이 글보다 더 드라마틱하다는 것을 알고 읽는 것이 맞다. 물론 기억력에 왜곡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나의 오랜 기억력은 그래도 상당한 수준이라 자부한다.
그러자 줄행랑 친 강사 두 명이 나타나더니 “원장님! 괜찮으십니까? 와! 원장님 다시 봤습니다.” 이것이 서울 사람들의 대화법이다. 왠지 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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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곧 학원을 정리 할 생각이다. 하지만 학생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 이들의 입시가 끝날 때까지는 책임져 주기로 했다.
입시생은 선생도 중요하지만 학생에 따라 환경이 바뀌는 것도 큰 부담으로 작용되니 이를 들어 주고자 했다. 그런데 9월쯤 되자 학생이 점점 줄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아까 “원장님! 다시 봤습니다” 하던 그 선생이 홍이대 앞에 작업실을 차려 놓고 학원을 여기저기 다니며 돈 좀 있는 집안의 학생들을 자기 작업실로 데려 갔다.
야! 서울 들놈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더니 ‘다시 봤니 어쩌니’ 한지 얼마나 됐다고 내 학원에서 네고도 없이 학원비를 가장 잘 내는 학생들을 데리고 나갔다. 이는 미술학원 다니거나 운영 할 사람들은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친구는 월 15만원을 받다가 입시가 가까워지면 25만원 나중에는 50만원 이상까지 요구한다.
그러면 부모 입장에서는 이미 학원을 옮겼으니 방법이 없어 따라 간다. 참말로 학생 때부터 이 모양이다. 사람을 가장 절박한 상황으로 몰고가서 돈을 뺏어가는 수법이다. 하지만 난 정의의 사도가 아니다. 또한 곧 학원을 정리할 생각이었기에 그냥 듣고 말았다. 이는 학생들의 선택이고 또한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 학생들을 위해 더 좋다고 판단했다.
지금 학생들 놓고 싸워봤자 당장 입시생들에게 도움 될 것도 없다. 1월쯤 되어 입시가 끝나고 미순이가 찾아왔다. 자기는 억울하다며 나한테 죄송하다고 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얘는 우리학원에서 청소하는 조건으로 무료로 다니고 있었는데 좀 있는 집의 알짜 수강생들이 잘 따랐다.
그래서 미순이를 데려가야 다른 학생들이 따라갔기 때문에 이선생이 미순이를 데려가는 조건으로 모두 같이 갔다. 이후 점점 수강료를 올리더니 입시가 가까워지자 미순이에게도 수강료를 요구했다고 한다. 결국 입시에서 떨어지자 그 곳에서 쫓겨났고 내가 문을 닫아 갈 곳이 없어 졌다. 사실 난 미숙이가 학생인 것은 알지만 그렇게 잘 아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니 참을 수가 없다. 사나이 눈물에 약한 것 아니겠어? 그래서 홍이대학교 시각디자인과 과사무실에 전화했다. “나 G전자 연구소에 근무하는 정동배라는 사람인데 누구 학생 그곳 학생 맞죠. 지금 만나고 싶으니 G전자 연구소 앞으로 좀 보내 주셔요” 하고 전화를 끊었다. 얼마 후 이선생이 찾아 왔다.
그래서 학생들 빼돌린 것과 미순이한테도 학원비 받은 사실, 얼마 전에 돈 안 되는 학생들 내 쫓은 것 까지 모두 확인했다. “너 따라와 좀 맞아야겠다”, “원장 선생님! 회사 모르게 학원하시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학교로 전화 하실 생각을 다 하셨어요?” 뭐 살짝 협박 같은 것이다. “야 이놈아! 대학생이면 기본이 되야지 너는 그 기본이 안 됐어!”
이 친구는 보통 이상의 키에 체격이 호리호리하고 날렵했다. 그래서 작은 내가 우습게 보이기도 하고 G전자 다니는 내가 학원 운영하는 것으로 오히려 나를 협박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이러는 것은 학생들 빼돌린 것으로 화내는 것이 아니다. 그 이후 그의 행동에 대해 화가 났고 난 이미 학원을 정리했다.
암튼 정도 경영도 힘들다. 그래서 문래동의 작은 공장들 사이의 한 골목으로 데려가 엄청 두들겨 팼다. 그러자 이 친구도 뭔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자 급속히 태도를 전환하며 덤벼 들었다. 난 빠르지는 않지만 싸우는데 일반인 보다 두려움이 적은 편이다. 맞으면 몇 대 고맞 치면되고 한 대 치고는 빨리 빠지면 된다.
그렇게 요리조리 피하면서 코피가 날 정도로 두들겨 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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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이 친구는 드디어 독기가 올라 니 죽고 내 죽자며 달려드는 것이 더 싸우면 안 되겠더라! 그래서 “그만하자! 그렇게 살지 마라. 미순이한테 사과도 하고…,” 그렇게 싸움을 끝내버렸다.
이 친구는 이제 막 반격 할 준비를 마쳤고 한 대도 못 때리고 엄청 피터지도록 맞기만 했는데 내가 그만 하자고 하니 얼떨결인지 그만 하잖다. 이선생 얼굴에 피가 터져 여차하면 내옷에 묻을 것 같기도 했다. 난 항상 흰색 와이셔츠를 입고 다녀 피를 묻히고 회사에 들어갈 수는 없잖냐?
나중에 미순이가 이 소리를 들었는지 회사 앞으로 찾아 왔는데 무슨 물건을 팔아 달라하여 사 주었다. 아마도 물건을 팔고는 있었지만 그것 때문에 온 것 같지는 않다. 나야 미순이 한테 별로 빚진 것도 없고 해서 그렇게 학원을 모두 접었다. 2년을 회화과 간다며 시간을 낭비하고 산업대 디자인과에 편입했다.
태강그룹 딸과 사위도 함께 편입하여 같이 다녔다. 이번에는 이들도 야간이다. 지금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 친구는 술도 사주고 가끔은 동기들에게 회도 사주었다. 노블레스 비슷한 건가? 이 친구는 짙은 청색, 난 흰색 스쿠퍼를 끌고 다녔고 삼성 다니는 친구와 현대 다니는 형도 자가용을 타고 다녔다.
그 외에도 동기 중에는 동울대학 사학재단 손자도 있다. 우리는 나이도 비슷하여 친하게 지냈다. 문래동에서 산업대를 다닐 때는 주로 오후에 성수대교를 건너 다녔다. 1994년 10월 아침에 성수대교가 붕괴되어 그 이후는 영동대교로 다녔다. 아침이 아니라 저녘에 성수대교가 무너졌으면 나도 지금쯤 없을지도 모른다.
G전자에서 기능직으로 출발했고, 이후 9급은 건너뛰고 8급이 됐고, 대학을 마치고는 7급이 됐다. 호봉이 높고 영어 등 모든 준비를 마쳐 6급이 되는 해에 그만 두고 서울대학에 들어갔다. 하지만 난 사실 이런 것과 상관없이 원하는 직급을 그냥 가질 수도 있다. 이는 동료 직원들은 물론이고 김부사장도 모른다.
그러니까 난 바닥을 기면서도 하늘 위에 살았다. 그러면서도 주로 OEM을 처리했다. 대학을 마치면서 제품디자인을 맡았지만 OEM은 계속 내 담당이다. OEM은 반도체로 치면 파운드리 비슷하다. 초기는 아시아 지역에서 출발했지만 나중에는 남미, 북미, 유럽, 러시아, 아프리카 등 전세계를 모두 내가 담당했다. 하지만 워낙 오래 하다보니 척하면 척이다.
대부분 협력업체와 일을 했고 당시 내가 발주하는 일만 월 5억 정도 됐다. 적을 때도 1억은 넘었던 것 같다. 그렇다 보니 견적서를 보면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바로 알 수 있다. 정확히는 일의 분량만 예측하면 토탈 가격으로 바로 집행했다. 우리나라 공직자들처럼 머뭇거리지는 않았다. 그러면 일이 자꾸 커진다.
대학로에 있는 한국진흥원에서 G전자 공모전 전시회가 열렸다. 직원들 모두 참석하라고 했다. 대략 열 명 정도가 전시 준비를 했고 나머지는 그냥 자리를 빛냈다. 난 그 나머지다. 그런데 갑자기 전시장 벽 전체 빙 둘러에서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난 전원 접속 부분이 있는 플러그를 보고 이를 뽑으려고 달려갔다.
손으로 잡자 순간 손바닥이 전기 줄을 따라 화상이 일어나 주변의 천으로 잡고 코드를 뽑았다. 실내는 아수라장이고 연기가 뿌옇게 났다. 대략 2-3초 정도 늦었으면 G전자가 국가기관 하나를 홀라당 태워 먹을 뻔 했다. 대략 100여명 이상이 그 공간에 있었지만 화재를 막거나 위험을 막으려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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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다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것 같다. 이미 몇 명은 밖으로 도망갔고 나머지 대부분은 곧 큰 화재가 날 수 있는 것을 전혀 예상치 못하고 ‘뭐야, 뭐야’ 만 외쳤다. 내가 손의 화상을 감수하지 않았다면 100% 불이 났다.
그냥 굵은 선을 바로 연결해 놨기 때문에 불이나면 전체가 동시에 타버리는 상황이다. 배선이 천정 쪽으로 빙 둘러 있고 아래는 여기저기 제품으로 연결되어 있다. 전기누전 화재가 발생하면 순간적으로 모두 타버리는 상황이다. 매우 위험했으나 이를 인지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내가 찰라에 코드를 뽑아 위험을 막았지만 입구쪽으로도 전선이 있었으니 화재가 발생 했으면 큰 인명 사고로 이어질 상황인데 이를 위기로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전기에 대한 이해가 이렇게 부족하나? ‘뭐야 뭐야’ 만 하며 기껏 자기 코로 연기 들어가는 것만 염려하는 정도다.
난 손에 화상도 약간 입었지만 염려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연기가 좀 빠지자 상신형이 옆에 서 있어서 “형이 배선했어요?” 하고 묻자 그렇다고 했다. “아니 배선을 어떻게 했기에…,” 하면서 플러그를 분해 해보니 딱 누전되게 해 놨다. 그래서 순간 나도 모르게 상신형한테 화를 내며 녹은 부분을 짤라내고 다시 배선했다.
난 아직도 상신형이 왜 그렇게 배선했는지 알지 못한다. 암튼 승순형도 재미난 사람이다. 우리팀의 승순형은 518때 광주에서 군인으로 진압군이었고, 같은 팀의 춘석이 형은 조신대학교 학생으로 운동권이었다. 하도 특이하여 두 사람에게 한 명씩 따로 물어봤더니 둘다 사실을 알고 있다.
당시 내가 G전자의 위기를 모면한 것을 아무도 모르는 줄 알았는데 학교에 있을 때 김부사장이 한국진흥원 원장으로 가서 만났는데 이를 알고 있었다. 난 G전자의 화제를 막아 국가기관 하나를 구하고도 감봉 당했다. 아마 김부사장도 몰랐다가 뒤에 누군가에게 이 사실을 들은 것 같다. 김부사장이 물어지보 않았으면 이 글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성불사라는 업체가 견적서를 이상하게 들고 오기 시작했다. 주로 진주사와 6:4 혹은 7:3으로 발주했는데 견적서로 장난을 치고 있다. 성불사는 로얄페밀리라는데 먼 페밀리 같다. 하지만 난 G전자에 목멜 사람이 아니니 이런 것에 개의치 않고 일만 잘하면 된다.
그런데 대충 장당 10만원 정도의 견적서가 갑자기 7-80만원으로 올라 왔다. 사실 이 필름 값은 원가가 1천원 정도 밖에 안 된다. 모두 기술자들의 실력을 인정하여 회사에서 가격을 높게 책정해 주었다. 그동안 가격을 안 올렸다고는 하나 기술의 발전으로 오히려 가격을 내려도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정도는 나도 안다.
그런데 상호 약속을 어기고 몇 배의 견적을 올렸다. 난 담당 직원을 불러 견적을 다시 해 오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다시 해온 견적도 가관이다. “아니 지금 장난하는 겁니까?”, 내가 화를 내자 미쓰김은 “사장님 지시라…,”, “사장 당장 들어 오라 하셔요.” 이들은 작업필름 크기를 30x30 정도를 60x60 정도로 키워 온 것이다.
그러면 금액이 몇 배로 늘어 버린다. 정사장은 그동안 가격이 안 올라 그렇다고 해명 했으나 그러면 가격 인상을 놓고 회사와 협상을 하면 될 일이지 하필 내 견적서로 장난을 친 것이다. 황사장은 비교적 나에게 우호적이었으나 정사장이 가격을 올리면 황사장 역시 손해 볼 것이 없어 이 일만은 약간 장사장 쪽으로 중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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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둘이 치는 고스톱 일 수도 있다. 당시 난 파견된 일개 기능직 사원이었으나 내 결정으로 월 수억을 집행했지만 사실은 수백억을 결정했다. 내가 필름(반도체도 바로 이 필름으로 하는 초정밀 작업이다)으로 시방서를 작성해 보내면 창원 설계실에서 양산업체에 발주한다.
양산업체는 Sample를 만들어 나에게 보내면 내가 승인 혹은 거절을 결정한다. 이는 팀장의 결제도 받지 않는다. 내가 거절하면 그 업체는 매우 곤란해진다. 그래서 어떤 때는 업체 사장이 전국에서 Sample을 들고 올라와 밥을 먹자고도 했지만 단 한 번도 응하지 않았다.
난 마음이 약해 밥만 먹어도 흔들릴 것이 뻔하다. 동명 이인인지는 모르겠으나 노재봉 전)총리 이후 들어온 조백제 전)KT사장 역시 이런 협력 업체 사장 중의 한 명인 것으로 추정된다. 학교에 문제가 생기며 들어왔고 이후 내가 만나지는 못했지만 당시 내 말 한마디면 집에서 자다가도 서울로 뛰어왔다.
돌이켜 보면, G전자는 그런 결정을 고졸인 나에게 맡기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 결정권을 윗 사람에게 주었다면 이들은 분명 다른 것을 요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난 정말이지 진심을 다했고 가끔은 창원에서 급하게 올라와 승인을 요구하면 수고한다며 내가 자판기 커피도 뽑아 주었다.
그러면 양산업체 직원은 내가 뭘 바라는 줄 알고 “사장님 올라 오시라고 할까요?” 했다. 그때 내가 조백제를 불러 훈련을 좀 시킬 것을 그랬나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그런 나에게 성불사는 계속 태클을 걸었다. 견적서를 다시 쓰게 하면 계속 장난을 쳤다. 급기야 성불사로 나가는 일을 전부 진주사로 돌려 버렸다.
한참 일하고 있는데 김부사장이 “어이! 정동배! 너 요즘 왜 성불사에 일을 안줘?”, “견적서가 계속 잘 못 올라와서 그렇습니다” 김부사장이 다시 지나가며 이번에는 화를 냈다. “정동배! 성불사에 일 좀 주라니까?”, “그게 견적서가 너무 엉망이라…,”, “야! 주라면 줄 것이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아! 견적서가 엉망이라는데…, 자꾸!”
얼마 후, 미스박이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10년을 넘게 같이 일했는데 아직 이름도 모른다. 항상 미스박, 미스김이라고만 불러 이들의 이름을 몰랐으나 G전자는 그런 협력업체 직원이 많다. 연구소 앞 대기실에는 항상 여러 명의 협력업체 직원들이 있다. 그 중 미스박은 성격이 가장 좋았고 나와 잘 맞았다. 그런데 그날은 표정이 좀 이상했다.
조용히 부르더니 봉투를 하나 꺼냈다. “이것 사장님이 주래요” 백화점 상품권 큰한묶음이 몇 백인지 아니면 천만원 정도 되어 보였다. 난 즉시 이를 들고 황사장을 찾아갔다. “사장님! 난 진주사를 믿고 일하는데 이러면 서로 믿음이 서겠습니까?” 하며 돌려 주었다. 황사장은 여러 변명을 했다.
나보다 발주 량이 적은 직원들도 차량 등 요구하는 사람이 많단다. 그 중 내가 가장 큰 고객이라 그냥 고마워서 그런다며 계속 주었지만 나 역시 입장이 난처했다. 필름 작업을 하는 협력업체는 두 곳 밖에 없는데 그 한 곳과 이미 적으로 돌아섰는데 진주사 마져 이러면 난 어디서 작업을 계속하겠는가? 무엇보다 진주사 이실장은 나와 명 콤비다.
서로 큰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 맞았는데 사장이 계속이러니 매우 곤란했다. 그렇게 상품권을 돌려 주며, “다음에 이런 것을 주려면 팀장이나 책임을 통해 전 직원에게 주십시오” 하고 나오는데 정사장이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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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불사 바로 앞의 빈 사무실에서 기다렸더니 정사장이 들어왔다. 정사장은 무슨 운동을 하는지 체격도 좋고 키도 크다.
“정동배씨! 언제까지 G전자에 있을 것 같습니까?”, “무슨 말입니까?”, “우리 회사로 오시죠. 진민이가 과장으로 왔는데 바로 부장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니, 내일은 내가 알아서 결정합니다.” 한참을 고민하더니, “그럼 부사장을 드리겠습니다. 월급도 G전자의 두배 아니면 새배까지 드리겠습니다.”
정사장은 내가 G전자에서 받는 월급이 적지 않는 것도 잘 안다. 사실 내가 눈치로 알지만 창원에서도 나를 데려가려고 많이 노력 했다. 내가 해외 출장을 많이 다닌 것은 디자인연구소가 아니라 모두 사업체에서 보내준 것이다. 김부사장은 많은 직원을 데리고 있기 때문에 나한테는 관심도 없다.
내가 그냥 항상 고맙게 생각하여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이지 김부사장이 나를 도와 줄 것이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다. 물론 그렇다고 원망을 하지도 않았다. 암튼 모두 창원 공장에서 나를 데려가려고 수고한 것이다. 같은 연구소 직원들은 각자 다른 오해를 하고 있겠으나 난 창원 공장의 이런 노력을 잘 안다. 다만 모른 척 했을 뿐이다.
창원 공장 입장에서는 내가 내려가면 매우 유익하다. 세계 각국의 수출 흐름을 잘 알고 있고 즉시 일처리가 가능한 내가 내려가면 리프로마스트(요즘은 출력기) 기계 한 대만 있으면 생산성이 확 올라간다. 내가 이를 알아채면 회사에서도 논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계속 모른 척하기도 힘들었다.
G전자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G전자와의 약속을 그만 둘 때까지 믿었다. 그래서 누가 월급을 더 주고 들 주고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다. 난 대학 마치고 그만 둘 생각이었지만 나이가 들어 대학원 들어가고 그만 둘 계획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어쩌면 G전자에 있는 사람들은 이 약속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나와의 약속이기도 하다. 그러니 돈을 많이 주건 적게 주건 상관없이 난 내 목표가 뚜렷하여 그 많은 흔들림에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외에도 외부 업체에서 오라는 곳도 좀 있었다.
G전자에 다니면서 나를 유심히 지켜 봤다며 친척 회사로 부르기도 했다. 다른 부서 사람들인데 난 영업, 총무, 기획, 마케팅, 제품시험연구소, 중앙연구소 등 다른 부서 사람들도 많이 알고 지냈다. 그러니 정사장의 러브콜은 그냥 잡소리 정도로 들렸다.
정사장은 요구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사무실에 들어 가더니 죽도를 들고 나왔다. “얍, 얍” 그 넓은 공간에서 혼자 칼춤을 추고 랄지이다. 난 눈도 깜빡하지 않고 그대로 보고 있었다. 혼자서 무슨 무술 같은 것도 하고 벽을 차기도 하고 마치 친미 놈 같았다. 한참을 난리치다가 지뿔에 지쳐 헉헉 거리며 옷을 입고 나가자고 했다.
그날 이후 난 성불사에 단 한 건의 일거리도 주지 않고 퇴사 했다. 김부사장은 계속 성불사에 일을 주라고 성화였고 둘이 다툴 때면 200여명의 연구원들이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둘 다 목소리도 크고 어느 한 쪽이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부사장과 복도에서 큰소리로 다투면 다른 사람들은 살얼음판이었을 것이다.
200여명 연구원 중 유일하게 부사장께 덤벼들고 싸우는 사람이었만 이는 사실 김부사장을 생각해서 그런 것이다. 나도 나름 다 계획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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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김부사장은 차에서 공천 이야기도 하여 주변이 깨끗해야 된다고 생각했고 내가 도와 드릴 것이라고는 그것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G전자에 대해서는 항상 고맙게 생각하지만 그래도 우선 순위는 김부사장이다. 난 곧 G전자를 떠날 것이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어떤 형태든 은혜를 갚고 떠나고 싶었다. 우리나라 대기업 본사에서 누가 나 같은 사람을 받아주며 또 누가 두 번씩이나 회사를 관둔 놈을 데려와 계속 일하게 하겠는가?
난 은혜를 아는 사람이다. 옹고집이라 그랬던 것은 아니니 이해해 주실거라 믿는다. 난 고졸로 들어갔지만 대졸 이상으로 살았다. 이는 공무원들이 좀 배워라! 주인 의식과 의지가 있어야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 된다. 공무원은 고졸로 들어가 국졸이 되어 퇴임한다. 그것도 아주 멍청한 국졸이 되어 5급으로 퇴임한다.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똘똘 뭉쳐다니는 것 밖에 없다. 한편으론 영혼없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G전자 디자인연구소는 석박사도 많았지만 거의 대부분 회사 돈도 얼마 쓰지 못하면서 눈치만 보고 다녔다. 하지만 고졸인 난 회사 돈도 많이 쓰고 전혀 눈치도 지보 않고 다녔다. 아마도 김부사장이 나름 편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후 성불사는 근처도 가지 않았다. 건방지게 부사장을 끌어들여…, 뭐 이런거다. 김부사장이 사무실로 불렀다. 통장을 하나주며 은행에서 돈을 찾아오라고 했다. 그러니까 부사장님하고 난 직장 상사 개념 보다는 그냥 잘 아는 동네 어른 정도 혹은 먼 친척 정도로 봐도 된다. 지금 이런 일이 아니면 그냥 댁으로 찾아가 밥달라며 먹고 와도 될 정도…,
그래서 이런 일은 별 것 아니다. 좀 솔직한 표현을 하자면 그 분의 사적인 심부름이 나에게는 영광 비슷했다. 그런데 문제는 통장이다. 그 통장은 협력업체 사장들의 매월 상납금이 들어있었다. 그러니까 뇌물을 받고 있었던 것이라기 보다 나를 시험에 들게하기 위해 만든 뇌물 통장 비슷했다. 난 뼈를 묻을 사람이 아니니 시험에 드는 것도 싫다.
김부사장은 돈이 많은 사람이다. 그러니 업체에서 김부사장 이름으로 몇 만 원의 뇌물을 받을 사람이 아니다. 이는 내가 어떻게 하는지를 보기 위한 것 같다. 위에 보고해 봐야 아무것도 아닌 정도…, 그 이후 난 김부사장을 계속 피해 다녔다. 그런 일련의 일을 겪으면서 많은 일들을 알게됐다.
누구는 뭐를 받고 누구는 뭐를 요구했고 누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등 참으로 많은 비밀들이다. 하지만 걱정 하지마라. 난 아직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이 글로 살짝 두려워 하는 정도는 감수해야 되지 않을까? 일종의 공정 뭐 비슷하게…, 그렇다고 내가 이런 세상을 원망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랬다.
난 G전자 각 부서 사람들과도 가까웠지만 정부 관계자들이나 다른 외부 사람들과도 가깝게 지냈다. 마치 세상이 다 내 것인 것처럼 돌아다녔다. 구로, 평택, 창원, 미국, 일본, 남미, 유럽 등 각 나라 지사나 바이어들까지 많이 알고 지냈다. 어쩌면 G전자의 왠만한 임원 보다 더 많이 알고 돌아다녔는지도 모른다.
G전자의 문서가 어떻게 돌고 어디로 가는지도 잘 안다. 대충 몇시쯤이면 회사 문서가 어디쯤 가는지 등 거의 대부분 정확히 안다. 그렇다 보니 같이 일하는 다른 부서 사람들은 나를 홍대나 서울대 출신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각 나라 바이어들도 만나고 각 공장 설계실과 일을 하는데 전혀 막힘이 없으니 그렇게 보는 것도 당연하다.
어쩜 같은 연구소 사람들도 내가 고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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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밖에서 만나면 ‘너 고졸이였어?’ 하고 되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200여명의 명문대 연구원들 속에 유일하게 디자인하는 고졸이니 누가 의심하겠는가? 또한 년 수십 명이 빠지고 새로 오니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날 보고 ‘정동배씨!’라고 부르는 사람도 없다.
지금 만나면 수백 명의 디자이너들이 전부 ‘동배야!’라고 부른다. 다들 한참 형들이다. 좀 윗 사람들은 ‘어이! 정동배!’ 이렇게 부른다. 한 번은 엘베에서 누군가 “어느 부서입니까?”, 하여 “디자인연구소입니다.”, 했더니 “그럼 홍대 출신이네요”, 하더라 그래서 “아뇨. 부산기공 나왔습니다” 했더니 오히려 자기가 더 미안해 하더라.
공고 나온게 자랑스러운 사람은 우리나라에서 나 밖에 없을 것이다. 졸업 후 설계실이나 다른 회사에 근무하는 부산기공 선배들도 많이 만났는데 다들 대부분 국가에 사기당해 공고에 갔지 그냥 공부 했으면 아마 윤석열 대통령 동문이 됐을 거라며 애써 출신을 감춘다. 내가 외국에 다닐 때는 서울대 출신으로 오해 받기도 했다.
왜 고졸은 이렇게 일하면 안 되나?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지인이 있을 정도로 10여년을 거의 날아 다녔다. G전자 디자인연구소의 서울대 출신도 나처럼 각 나라 바이어를 만나거나 공장을 자유롭게 다닌 사람은 거의 없다. 난 어느 공장을 가도 설계실 사람들과 대화가 잘 된다. 설계실 사람들도 디자인연구소 사람들 중에서는 내가 제일 편하단다.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도대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될지를 몰라 답답했는데 난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러니 난 G전자에서 서울대 석사 정도로 지내다가 비슷한 급으로 서울대학원에 들어갔다. 그러니 무서울 게 없는 사람인데 대법원에서 단 한 방에 사람을 무너트려 버렸다. 난 불법을 하며 돌아다닌 사람이 아니다.
다 상식에 맞게 행동 했는데 대법원에서 당시의 기준으로 논리에 전혀 맞지 않는 결정을 했다. 지금은 맞는 것 같기도 하여 이는 잘 모르겠다. 얼마 후 구국자가 찾아왔다. 국자는 구자경 회장 외손자다. 내가 미술학원 할 때 와서 도와 주기도 하고 대학로에서 술도 많이 마셨다. 기능올림픽 끝나고는 내가 대학 준비한다니까 우리집에 와서 수채화를 가르쳐 주곤 했는지 술만 마셨는지 헷갈린다. 그러니까 직장을 빼면 가장 가깝게 지냈고 자주 만난 친구다. 내가 시골에 내려 와서는 사천 집에도 찾아와 고생 엄청하고 돌아갔다.
두 번 다시 너 한테 안 온다는 표정으로 갔다. 서울에 소송이 있어 올라 가면 국자 집에서 자고 갈 정도로 절친이다. “동배야! 너 회사에서 무슨 사고를 친거야?”, “내가 사고는 무슨 사고를 쳐! 임마!”, “네가 사고를 안 쳤으면 왜 외할아버지가 널 만나고 오라고 나를 보냈겠냐?” 구자경 회장이 보냈다는 소리다. 대충 예상이 되는 일이다.
또한, 얼마 전 유재홍 형이 구속됐다. G전자가 벌컥 뒤집혔다. 재홍형은 나한테 참 잘해주던 친형 같은 사람이다. 가끔 선물도 챙겨주는 등 잘해주어 나도 친형처럼 따랐다. 재홍형은 대충 이런 사람이다. 상고 출신으로 제일제당 총무과에 입사했는데 이맹희 회장 손녀와 눈이 맞았다. 결혼을 하려 했는데 집안에서 반대했다. 일종의 리얼 막장이다.
그래서 둘이 결혼하고 회사를 떠났다. 형수님은 임뭐였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맹희 회장은 이씨인데 형수님이 왜 임씨지? 우리는 자주 만나 서로 잘 안다. 재홍형의 목표는 돈을 많이 벌어 제일제당 그러니까 지금의 CJ를 인수하는 것이라 했다.
그렇게 G전자 본사 총무과에 입사하여 온갖 비리와 안 좋은 일을 도맏아했다. 회사 돈도 빼돌리고 밖으로는 포청생수, 종합금융 등 여러 사업에 손을 댔다. 총무과 과장과 전체 직원들에게 뇌물도 먹여가며 돈을 모았다. G전자 입장에서야 개똥이지만 나에게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 같다.
국가가 싼 똥은 국가가 치운다 060/240
그런데 직원 중에 한 명이 받는 돈이 적다며 일종의 사내 신문고에 글을 올렸다. 그러면 그 신문고는 어차피 총무과에서 관리하니 이를 재홍형이 보고 돈을 좀 더 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날은 전무 비서인가 누가 그 제도 생기고 처음으로 그 신문고를 열었다. 그렇게 그동안의 비리가 적발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회사는 최대한 빨리 마무리 했지만 이미 대충 다 알려졌다.
사람들은 기능올림픽하면 한편으론 무시하면서 한편으론 정부와 어떤 연결고리 비슷한 것이 있는 것으로 아는 것도 같다. 뭐 그럴 수도 있고…, 형수님은 그런 날보고 도와 달라며 울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난 적당한 내 집에 공방 하나 정도 가지는 소박한 꿈으로 살았는데 재홍형은 그 모든 것을 뛰어 넘었다.
한 번은 재홍형이 불러 갔더니 강남역 사거리의 한 빌딩에 들어갔다. 그곳은 새벽 2시경도 활기차게 움직이는 또 다른 세상이다. 강남의 많은 부자들이 이곳에서 서로 만나 거래를 하기도 했다. 재홍형이 만난 사람은 일종의 사채업자 비슷한데 워낙 찾아 오는 사람이 많아 만날 때면 초당 미팅료가 얼마씩 책정된다.
또 한 번은 구로의 사무실로 데려갔는데 쌍둥이 빌딩이라며 건물 두채를 올려놨더라. 총무실 직원들은 마치 사장을 모시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참으로 특이했다. 아무튼 당시 부사장인가 누가 와서 사태를 조사 하고는 여기는 전부 도독들놈 소굴이라며 화를 냈다.
한국노총 노조위원장도 같은 건물에 상주해 있었다. 이들은 본사의 기능직인 나를 보고는 왜 노조에 가입하지 않느냐며 몇 번의 노조가입을 권장 했으나 거절했다. 난 기능직이지만 평생 노동자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난 자유인이다. 이들은 본사에 기능직이 있다는 소문만 들고 믿지 않았는데 나를 직접 보고는 매우 좋아했다.
아무튼 이런 일이 같은 빌딩에서 있었고 김부사장은 여기에서 가장 높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런 일련의 일 등으로 그룹에서는 연구소에 대해 어느 정도 불신이 있었는데 모두 김부사장에게 맹목적으로 충성을 하니 믿을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다. 김부사장의 작품일 수도 있고, 성불사나 진주사 등 협력업체의 장난일 수도 있지만 내가 태클을 걸었고 이 일로 김부사장과 싸움이 일어나자(사람들 예상보다 당시 매우 큰소리로 다투었음) 이 말이 구회장 귀에도 들어갔나 보다.
어떤 놈인가 조사해보니 왕따 비슷한게 조금만 도와 주면 충성을 다 바칠 것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또 하나는 국자가 애니메이션 회사 등을 전전긍긍 하자 나를 통해 자연스럽게 외손자를 연구소로 입성 시킬 수 있는 등의 여러 가지 예측이 가능하다. 그 이후도 국자는 여러 차례 나를 찾아왔다. “동배야! 너도 과장 뭐 이런 것 해야 안 되겠어? 그곳은 선임, 책임 이렇게 부르나? 말만해라.
네가 원하면 뭐든 시켜 줄께” 이런 일이 수 차례 있었던 점 등을 고려하면 구자경 회장 입장에서도 뭔가 연구소에 대한 계획이 있었던 것 같다. LG그룹에서 구자경 회장의 빽이면 마다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단 한 사람만 빼고…, 난 구자경 회장이 100% 신뢰 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실력있는 사람이다.
어쩌면 가족보다 더 신뢰해도 좋을 사람이다. 하지만 나의 학력은 다음 회장이 방금 나를 버리고도 누군지 모를 사람이다. 난 회사에 오래 있을 생각이 없다. 또한 내가 들어갈 때 그렇게 약속했다. 난 회사와의 약속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회사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이후 서울대학원에 합격하여 회사를 그만 두면서 창원 공장, 수출영업, 상품기획 등 그 동안 함께 일한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했는데 모두들 부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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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들을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나를 기억한다. 왜냐하면 수출 담당 디자이너는 나 혼자였으니까.
내가 이렇게 고통 받고 있지만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일은 환경대학원에 진학 한 것이고 우리 황교수님을 만난 것이다. 물론 유교수님, 양교수님, 권교수님 등 서울대는 워낙 기라성 같은 교수님들이 많다. 난 어려운 환경 때문에 초등학교, 중학교에서 공부를 한적이 거의 없다. 고등학교에서는 기능올림픽 선수였고, 대학은 출석 시간을 지킨적이 없을 정도로 4년내내 야학이다. 태어나 풀타임으로 공부라는 것을 한 곳이 바로 서울대 환경대학원이다.
남들은 어떻게 볼지 몰라도 내가 아침부터 저녘까지 매일 공부한 곳은 대학원 밖에 없다. 그러니까 내가 유일하게 공부한 정규 교육기관이 환경대학원이다. 또한 환경대학원은 로스쿨이나 의전원이 생기기 전에 차떼고 포떼면 국내 유일한 전문대학원이다.
이러니 관점에 따라 나를 여러 가지로 볼 수도 있다. 학교 성적을 놓고 보면, 내가 시골에 내려갔을 때처럼 성적표를 살짝만 바꾸면 공부를 엄청 못하는데 누군가의 뒷배로 고등학교에 진학 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누군가 그런 환경을 만들었고 그래서 남들은 9년씩이나 하는 공부를 단 한 번도 못하다가 진짜 딱 하루 공부했다.
그러니까 당시에 딱 하루 공부하여 그 정도 성적이면 한 일주일 정도 공부 했으면 서울대도 갈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걸 배운다고 뭘 9년씩이나 공부 해! 물론 그렇게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외형상 보이는 성적표만으로 판단하기가 쉽지 않는 사람임은 분명하다. 기능올림픽도 평가전 등을 얼핏 보면 운으로 겨우 국가대표가 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공식대회를 9번 출전하여 고등학생 때 1번을 제외하고 8번 모두 1등 했는데 금메달이 하나 밖에 없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나? 언젠가 동기 중 수원에 사는 친구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 친구는 그동안 받은 메달을 거실에 전시해 놨다. ‘나도 국제대회 같이 나갔는데 얘는 왜 이렇게 메달이 많지?’ 하며 순간적으로 이상했다.
아마 이 친구한테 같은 질문도 했던 것 같다. 이 친구도 나와 똑 같이 9번 출전했을 텐데 왜 이렇게 메달이 많은지 궁금하여 물었다. 그럼 내가 운이 좋아 올라갔을까? 아니면 운이 없어 금메달을 하나 밖에 따지 못한 것일까? 이 소송 진행하면서 대법원에 항의하려고 전화를 걸었다.
“그러니까 정교수님은 지금 소속이 어디란 말입니까? 지금 교수는 고맞요?” 하여 “모르니까 소송을 하지 내가 알면 왜 소송을 합니까?” 했더니 “아니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어떻게 합니까?” 하여 “내가 누군지도 모르니까? 내가 누군데? 소송을…, 그럼 내가 누구입니까?” 하다가 끊었다.
누구 보다 내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막상 소송이 진행되니 내가 누군지 모르겠더라. 난 공부를 못 한 놈도 잘 한 놈도 아니고, 똑똑한 놈도 어리석은 놈도 아니다. 난 잘난 놈도 못난 놈도 아니고, 세상을 잘 알거나 모르는 놈도 아니다.
난 천재 같기도 하고 보바 같기도 하다. 그러니 나도 내가 누군지 모른다. 돌이켜 보면, 지금은 내가 누군지 살짝 알 것도 같지만 말은 못한다. 왜냐하면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을 테니까? 따라서 함부로 나를 판단하지 마라. 하지만 키가 작은 것은 확실하다. 그러니 키 작고 안경 낀 놈은 맞다.
어느 누구든 현상을 말하되 평가 하지 말란 소리다. 건방지게…, 이 나라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빼면 온전히 내 편이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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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이상한 놈의 국어 실력은 신문, 잡지 등에 수백, 수천의 칼럼 등 글을 남겼고, 국가자격 문제 출제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엄청 많이 했다. 국회의원 원고 수백 쪽도 쓰고 박근혜 대표 원고 청탁(請託)도 받았고, 논문이나 책도 여럿 출판했다. 첨부의 끝에 일부 있다. 갑작스런 사건으로 다 챙기지는 못했다.
만약 최순실이 아니라 내가 원고를 썼으면 어땠을까? 그 때 박원홍 의원의 부탁을 들어 내가 박근혜 대통령의 원고를 계속 쓰고 있었으면 아마도 아주 근소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 됐을 수도 있다. 거의 한두표 차로 당선되어 임기 내내 부정투표 등으로 시끄러웠을지 몰라도 화려한 임기는 아니지만 평범한 퇴임은 하지 않았을까?
수학은 멀티미디어 타이틀 십수편을 서울음바에서 출판했고 3D 프로그램을 거의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 3D 프로그램은 수학에 필요한 모든 것의 답을 쉽게 구할 수 있다. 어쩌면 미래는 수학 문제를 푸는 것 보다 3D 프로그램을 배우는 식으로 수학이 변할 것이다. CAD 하나만 잘 다뤄도 상상을 초월하는 많은 값을 구할 수가 있다.
결국은 점들을 연결하거나 그 방향에 대한 예측 값을 구하는 것인데 요즘은 프로그램으로 얼마든지 쉽게 답이 나온다. 그러면 수학자가 만드는 공식의 넘어까지도 예측이 가능하다. 수학 자체만 보는 보수적인 교육자들이 이를 받아 들이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이들이 변하는 것은 과거에 주판을 버리는 것과 비슷하다. 왜 수학을 배우냐를 생각하면 이해하는데 별로 어려울 것이 없다. 지금과 같은 수학을 고집하면 교육자들이 젊은이들의 미래를 망치는 것이다. 그동안 영어 단어를 얼마나 열심히 외웠는지 미국에서 어학공부 할 때 각 나라에서 온 수강생 20여명이 단어 시험을 쳤는데 내가 만점을 받아 1등 했다.
나도 어떻게 체점 했는지는 모른다. 미국 현지인과 단어 내기에서도 이긴적이 있다. 그러니까 정규교육을 통한 국영수의 암기는 거의 공부 자체를 한 적이 없지만 실력은 다른 방법으로 인정 받았다. 결과적으로 난 공부를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는다. 아니면 잘하기도 하고 못하기도 한다.
고등학교에서는 수업 자체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전국 100만명 중 꼴지가 확실하고 서울대학원에서는 수석을 했으니 전국 1등도 확실하다. 공부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의 성적표를 놓고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전교도 아니고 전국 꼴등과 1등을 했으니 내가 공부를 잘하는 놈이야 못하는 놈이야?
아마도 우리 동기들이 이 글을 읽으면 내가 저런 놈하고 같이 공부했어? 하고 실망하는 친구들도 있을 것이고 또, 좋게 보면 참으로 만나기 힘든 사람과 공부하여 괜찮았다고 생각하는 동문도 있을 것이다. 97학번 120명(같은과 32명) 다들 좋게 좀 봐 주라. 난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 합격하고는 매우 기뻤다. 하지만 서울대 출신들이 모르는게 있다.
서울대학은 개인의 성공 즉, 지 잘 나려고 들어가는 곳이다. 물론 기능올림픽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기능올림픽은 가슴에 태극기를 단다. 태극기를 달면 개인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것이 있다. 그 긍지는 서울대생들이 모른다. 서울대 후배들아! 태극기를 달고 서울대학을 다닐 수는 없겠지만 항상 그 마음은 가지고 다녀라.
예체능이나 고졸 혹은 지방대 출신 중, 학벌에 목메는 사람들도 모르는 사실도 있다. 년간 십수 명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서울대학원 들어가는 방법을 물으려 나를 찾아왔는지 알 수 있다. 뒤에 다시 만나 그들에게 그래 원서는 썼습니까? 물으면 아직도 준비 중이란다. 그래서 꿀팁을 하나를 알려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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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모르는 진실 하나를 알려 준다. 우선 입학지원서를 넣어라. 서울대 총장이나 동문들에게는 다소 불편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어디까지나 난 펙트를 말한다.
내가 들어가던 97년, 한참 다니던 98년 이후도 그렇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은 절반 정도가 미달이다. 지원도 하지 않고 서울대 욕하며 졸업장만 받고 싶어하는 자들은 귀싸데기를 맞아도 싸다. 절반이 미달인 대학원을 뒤에서 욕만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칭찬 받으며 입학하고 싶으면 우선 원서를 쓰라.
아마 아직도 큰 변화는 없을 껄…, 몰랐지? 서울대 동창회서도 쪽팔려 하지 마라. 혹시 아나 이 글로 미달이 없어질지? 나, 서울대학교 총동창회 이사였다. 또 하나 팩트는 난 일반 학교의 정규 교육과정 공부는 분명히 못했다. 하지만 서울에서 나를 자주 만난 친구들과 G전자 서울대 출신들은 대부분 잘 아는 사실이다.
난 서울대학원 들어 가기위해 9년을 준비했다. 서울대학원을 목표로 서울대학원 영어만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서울산업대 친구들은 나교수님을 만나 우연히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겠지만 사실은 훨씬 전부터 서울대학원 준비를 했다. 영어는 절대로 하루 아침에 늘지 않는다. 책 한권으로 영어 완성! 등은 전부 거짓말이다.
기능올림픽 끝나고 마음이 너무 허전했다. 가슴이 뻥 뚤린 것 같았다. 대회 끝나고 30여년이 지나도록 내가 왜 은메달을 받아야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억울하고 화가나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 때 여자 친구도 있었는데 나를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않았다.
부모님도 나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그나마 이해 할 수 있었던 김부사장 등도 날 신병이란다. 가까운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은 국제대회 은메달리스트라고 말할 뿐이다.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은 국제대회 동기들도 마찬가지다. 각자가 다들 자신을 모르는데 누가 나를 알겠는가?
난 대회 끝나고 전체를 빙 둘러 보았고 7년간 준비했기 때문에 이 분야에 상식이 있는 사람이다. 나를 95점 정도로 보면 독일 선수는 50점, 영국 선수는 40점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독일놈이 금, 내가 은, 영국이 동을 받았다. 이유도 모르겠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뭐라 설명 할 수도 없고 말을 하면 변명 밖에 되지 않는다. 이 글을 통해 밝히지만 난 역대 선수들 중에서도 최고다. 내가 나를 아는데 현상을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일들이 내 인생을 계속 따라다니며 나타난다. 평생을 누군가 찍어 누르면 다시 일어서고 또 찍어 누르면 다시 일어나고를 수십 차례 말도 못할 정도로 많이 반복한다.
그러다 포기하면 키다리아저씨가 살짝 나타나는 것이 내 인생이다. 그러니 얼마나 단련이 됐고 실력이 있겠는가? 그런 나지만 국제대회의 충격은 그렇게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집에 있으면 숨이 턱 막혔다. 가끔은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10여년 이상 매일 밤 대회를 다시 치르는 꿈을 꾼다.
회사 사람들은 잘해 주려고 많이 노력했으나 이해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누가 나를 알겠는가? 그래서 다음 목표를 정해야 살 수 있었고 그것이 바로 서울대학교 대학원이다. 물론 서울미대를 말한다. 기능올림픽 끝나고 나이 23살에 이 실력으로 서울대학교 간다고 수능을 공부하는 것은 친미 짓이다.
사실 서울대는 일반인들 생각과 달리 이런 친미 놈이나 독종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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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놈이 서울대학을 나와가 아니고 저러니까 서울대학을 나온 것이 맞다. G전자 동료 중에 유재을이라고 있는데 재을이 형이 모교를 찾아가 정동배를 받아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박대감은 서울산업대 조영쇠 교수를 찾아가 인사하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는 불법이 아니라 기능올림픽 출신 중 산업대 나온 선후배 대부분은 이런 특혜로 들어갔다. 400점 만점에 국제대회 입상자는 200점을 주는데 합격선이 200점 후반대니 서류만 내면 합격이다.
이외에도 고려대, 홍익대 등 국제대회 입상자에게 특혜가 있는 대학들이 많다. 다만 산업대에 몰리는 것은 야간이기 때문이다. 박교수는 만날 때마다 물어보는 것이 이미 대학 문제는 다 끝났다. 솔직히 말해, 난 평생을 박대감 따라 다니기도 그렇고, 또한 난 진정으로 그림을 하고 싶었다. 퇴사 후는 인테리어업을 하며 살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왕 간다면 서울대학원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박교수님의 제안 혹은 지도를 무시하고 래몰 회화과에 지원하여 떨어졌다. 회화는 먹고 살려고 배우려는 것이 아니라 취미로 배우려 한 것이다. 바로 두달 후 전문대학을 갔다. 당시 정보로는 서울대학원을 가려면 영어를 잘 해야 하고 영어를 배우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영어 문장을 읽고 모르는 단어는 작게 메모하여 항상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시간 될 때마다 암기했다. 퇴근하여 확인하고 암기된 단어는 그대로 버리고 아직 암기 안 된 것은 따로 적어 벽이나 화장실 등 집 구석구석에 붙여 놓았다. 그렇게 한 달에 한 번씩 다시 정리하여 그래도 암기가 안 되면 그 단어만 별도로 모아 암기했다.
그렇게 영어 교재 몇 권을 떼고나니 영어 문장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조건 암기로 시작했지만 한 번 뭔가를 깨닫게 되니 이제는 뭘해야 할지가 그냥 정해졌다. 언제까지는 태를 더 보충한다거나 구동사에 더 집중해야 되는 등 방향이 정해지면서 공부해야 할 내용들이 휠씬 더 많아졌다. 문제는 역시 시간이다.
문래동에서 산업대는 멀었지만 유한공전은 가까웠다. 시간을 벌어야 공부를 하고 우선은 실력을 쌓아야 뭘해도 한다는 생각으로 능력을 쌓는데 최선을 다했다. 전문대학을 다닐 때는 영어를 읽을 수가 없어 중학교 앞에서 영어 발음을 한글로 쓰놓은 사전을 찾아 23살에 ABC부터 시작했다. 내 친구들은 잘 안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그렇게 편입공부를 해야 서울대학원에서 만족 할 점수를 겨우 받을 수 있다. 틈만 나면 정상창, 유재을, 정경화, 오성지 등 서울대 출신 G전자 동료들에게 서울미대에 원서를 낼 테니 떨어지면 책임지라고 반협박도 했다. 그 중에서 재을이 형이 가장 애쓰주었다.
그렇게 9년을 악착같이 준비 중에 나교수님을 만났다. G전자 디자인연구소는 서울대 출신이 많다. 내가 사직하고 나올 때는 우리팀에서 정경화와 이상지가 서울미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러니까 한 팀에서 3명이 서울대학원을 갔다.
1990년 한강 제방이 붕괴되어 고양군이 물에 잠겼다. 이후 화정동은 신도시로 다시 태어났고 난 화정동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아파트 분양을 받아 입주했다. 이렇게 최초의 화정동 주민이 됐다. 처음 예상과는 달리 나이가 들자 뭔가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회화전공을 하지 않길 잘 했다고 해야 할까? 결혼도 해야 하고…,
한 번은 평소와 다름없이 열심히 일하고 있었는데 우리팀에 연아공대 여학생이 인턴으로 들어왔다. 아버님이 진주 중앙시장에서 시계수린가 장사인지를 한다고 했다. 얼굴도 예쁘고 키도 늘씬하며 성격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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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날 약간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그녀와 농담 할 시간이 없었다. 반면 OEM 일들을 전부 나에게 넘긴 진민이는 할 일이 없는지 하루 종일 이 친구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도 일하면서 중간에 약간 짜증이 났다.
퇴근 시간이 되자 진민이는 퇴근했고 나도 일을 마무리하고 그 친구에게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우암동 대진극장 뒤의 친척집에서 머문다고 했다. 문래동에서 우암동을 가려면 버스가 영등포, 여의도, 마포, 신촌을 거쳐 우암동으로 들어가니 1시간 반 정도 걸렸다. 내가 이를 잘 아는 것은 결혼하기로 한 여자 친구가 바로 우암동 그 극장 뒤에 살았다.
그래서 그냥 반가웠고 같이 가자고 했다. 성산대교를 건너 가면 한 10분 아니면 20분이면 간다. 어쩜 10분이 안 걸릴 수도 있다. 이 친구도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 같이 나가려고 하는데 팀장이 불렀다. 창고에 가서 판넬을 정리하라고 지시했다. 사실 판넬은 나하고 상관도 없고 또한 별 정리 할 것도 없다.
그래도 팀장의 지시라 조금 기다리라 하고 판넬을 정리한 후 같이 나가려 하자 갑자기 나한테 욕을 했다. “넌 뭐하는 놈인데 하루 종일 노닥거리고 있어?” 하루 종일 팀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고 이제 퇴근하려는데 어처구니가 없다. 난 열명이 넘는 팀원들의 배가 넘는 일을 했는데 날 보고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며 욕설이다.
순간 화가 엄청 났다. 속된 말로 내가 사장 같으면 팀원 대부분 짤라 버리고 나하고 몇 명만 남겨두고 싶은 심정인데 나보고 하루 종일 놀았단다. 난 퇴근 시간이 되어 이 친구와 잠깐 이야기 한 것이 전부다. 그런데 날보고 그것도 욕을 하며 뭐라 하기에 이 친구를 먼저 보내고 “왜 그러십니까?” 하자 “내가 오늘 하루 종일 너를 지켜봤다.”
그 여학생 이름은 모르겠으나 그 친구와 하루 종일 떠들고 놀았단다. 참으로 기가찼다. “내가 언제 떠들고 놀았습니까?”, “뭐 인마! 내가 지금까지 쭈욱 지켜봤는데 거짓말이야? 이 끼새가!”, “왜 욕을 하고 그러십니까?”, “뭐 임마! 너 을죽래” 하더니 주먹을 날렸다. 피하기는 했으나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발씨놈이 팀장이라고 너무하는 것 아냐? 내가 뭘 잘못 했는데…,” 하며 나도 주먹을 날렸는데 그만 얼굴을 강타했다. “이 끼새가” 그러면서 책상을 뛰어 넘어 왔고 난 바닥의 알루미늄 막대를 들고 방어를 하자 팀장도 알루미늄 막대를 들고 둘이서 그날 스타워즈를 찍었다. 짐작컨대 팀장의 눈에는 홍대 출신만 눈에 보인다.
나머지를 같은 부류로 보든지 아니면 그 여자애를 마음에 두고 있었든 것 같다. 아무튼 팀장의 눈에는 하루 종일 노닥거린 진민이와 나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뺀질이 진민이가 퇴근하고 마지막에 잠깐 집 방향을 물어본 내가 하루 종일 희희덕거린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 친구가 바로 내 옆자리에 있어 평소 이야기를 안 한 것은 아니나 그 날은 정말이지 그 친구와 말할 시간이 없었다. 난 G전자에 근무하면서 시방서를 대충 수천 편을 썼다. 첫장은 A3지, 나머지는 A4로 대충 10여장 되는 시방서를 년 평균 수백 편을 창원 공장으로 보냈고 연구소 캐비닛에는 내가 작성한 시방서가 천체의 96% 이상이다. 양심들이 없나?
자기가 놀고 있다고 나도 논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난 OEM을 담당하여 꾸준히 할 일이 있는 사람이다. 또한 정말 그때 전)부인이 우암동에 살고 있었다. 그것도 그 극장 뒤에…, 하필 그 친구가 결혼 할 여자 친구 바로 옆집에 살 줄이야 내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뒤에 하도 억울해서 진짜 그 친구가 근처에 사는지 살짝 확인도 해봤다.
국가가 싼 똥은 국가가 치운다 066/240

10분이나 20분이면 갈 거리를 버스로 갈아타며 1시간 반을 가야하는데 태워주지 않을 사람은 또 누가 있겠는가? 아무튼 난 진짜 억울했다. 그래서 서울대고 나발이고 빨리 대학원 진학해서 회사를 떠나고 싶었다.
고리대학원을 다니는 윤진이형에게 말했고 진이형이 고대 대학원 교수님께 내 포트폴리오를 보여 주었더니 마음에 든다며 허락했다. 고대대학원을 가기 위해 원서를 작성해 여자 친구에게 고대에 접수 해 달라고 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날 교통사고가 났다. 돌이켜 보면 이도 참으로 이해가 가질 않는다.
왕복 5차선 도로로 내가 가는 방향은 편도 3차선이다. 3차선은 버스가 불법 정류장으로 사용하여 사실상 가로등도 없고 컴컴했다. 그런데 난 신호 대기 중이었고 신호가 떨어지자 옆 교차로에서 두 대의 차량이 내 앞을 갔고 난 그들 뒤를 이어 출발했다. 그런데 갑자기 ‘쿵’하더니 앞유리 위로 사람이 떨어졌다.
신호를 받고 100M 정도 밖에 가지 않았으며 내 앞에는 두 대의 차량이 지나갔고 옆 차선은 차량이 거의 없다. 그런데 어떻게 내 차위로 사람이 떨어질 수 있단 말인가? 급하게 내려 구급차를 불러 달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지나가던 사람이 명함을 주며 자기가 목격자라며 앞에 두 대의 차량이 지나갔고 가로등도 꺼져있다고 했다.
버스가 도로에 불법주차 하는 등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며 내 책임이 없으니 경찰서 가서 진술해 주겠단다. 하지만 그런 것 보다 우선 구급차를 불러 달라고 했다. 이상한 것은 이 뿐만이 아니다. 이분의 머리카락이 마치 부스러기 부서지듯이 바삭바삭하여 만지면 바로 가루가 됐다.
다음 날까지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는데 그때까지 가루로된 머리카락이 내 옷에 많이 묻어 있었다. 사람의 머리카락이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는지 모르겠으나 그냥 만지면 말린 국수 부서지듯이 바스라졌다. 경찰이 오더니 세브란스로 실고 갔고 세브란스 의사들 또한 이상했다.
응급 환자가오면 급하게 응급실로 데려가거나 다쳤는지 사람을 확인하는 것이 먼저인데 이들은 마치 올 것을 예상한 사람들처럼 구급차의 응급환자 혹은 시신을 쳐다도 안보며 건물쪽에서 오지도 않고 자기들 끼리 ‘네가 가라’며 서로 미루고 있었다. 경찰 또한 마치 예상 한 것 같은 행동을 했으나 이는 내가 공무원들과 일하며 이해하게 됐다.
이상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일일이 다 거론하면 변명만 되니 여기까지만 한다. 그렇게 이번에는 사람을 사망켜했다. 보름 정도 구치소에 있다가 풀려났는데 이 일로 고대는 물 건너 갔다. 유치장에 구속된 이후는 밖의 일을 알지 못한다. 친구의 지인이 변호를 했는데 구치소에서 나오자 한 번 찾아가 인사를 하라고 했다.
서초동 사무실을 찾아가 변호사는 만나지 못하고 사무장과 인사를 하고 있는데 밖에서 ‘쾅’ 소리가 들리더니 건물이 흔들렸다. “지진이다”, “아냐 가스 폭발이야” 하며 놀라 밖으로 나왔는데 도로에는 차량이 거의 없었다. 소리난 쪽으로 가자 길 옆에 사람이 있어 “무슨 일입니까?” 물었더니 “백화점이 무너졌어요” 했다. “백화점이 어디있는데요?”,
“여기가 백화점인데 지금은 없내요” 난 상품백화점을 모르기 때문에 현장에 있으면서도 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양옆의 큰 기둥은 마치 공사 중인 것 같다. 좀 기다리자 경찰과 구급대가 와서 길을 막았다. 나중에 집으로 돌아와 뉴스를 보고 건물 전체가 무너진 것을 알았다. 뭐 최초라고 볼 수는 없으나 그렇게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현장 목격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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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두 번째…, 이일 후 곧 바로 결혼했다. 그동안 살짝 피하기는 했지만 박대감님께 인사를 드리는 것이 예의 같았다. 그전까지는 가끔 현선이형이나 김부사장과 함께 인사를 드렸지만 이번에는 전)부인과 같이 갔다. 뭐 살짝 작별 인사 비슷했다. 그냥 모든 짐을 털고 가고 싶었다.
박교수님은 매우 반기는 것 같으면서도 예상치 못한 나의 방문에 좀 당황하는 것도 같다. “그래 이제 대학도 나오고 결혼도 했으니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거야? 내가 뭘 도와 줄까?”, “G전자 관두고 공부를 더 하기로 했습니다.”, “김부사장은 뭐래?”, “김부사장께는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래 대학원은 들어 간거야?”, “예”, “어디?”,
“서울대 환경대학원에 합격했습니다.”, “뭐?”, “서울법대 건물에 있는 환경대학원 아십니까?”, “뭐?” 하시더니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난 사실 매우 기쁘해 줄줄 알았다. “그래 다시 말해 봐 관악산에 있는 그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을 들어갔다고, 니가?”, “예”, “그래 니가 알아서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고 누가 말해서 들어갔어?”,
“혹시 나성숙 교수님 아십니까?”, “그런데..,”, “나교수님께서 말씀하셨고 제가 들어가는데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뭐! 나성숙이 지가 뭘 안다고 그래” 하시며 방으로 들어가 새배를 받으셨다. 이후도 박교수님을 몇 번 더 만났는데 누구에게 보고를 받는지 이제는 나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알고 계셨다.
송파구에 있는 빌딩도 보여주시며 말씀하시는 것이 이제 나에 대해 매우 친절해 지셨다. 마치 아들 대하듯이 이것 저것 설명도 해주셨다. 암튼 저 높은 곳에 있는 몇 분은 항상 나의 움직임을 주시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서울대가 원래 이런가? 호산대학 설립하신 이사장님도 식사를 하면서 여러 말씀을 하셨는데 대충 나와 비슷한 삶을 사신 것 같다.
당시 90이 넘으셨으니 지금쯤이면 돌아가셨을 것이다. 중앙학원 정상금 회장님도 나에게 참으로 잘해 주셨다. 정회장님은 K-DOS를 만드신 분인데 나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아마 미국에서 만드셨으면 충분히 빌게이츠가 되고도 남을 분이다. 그래서인지 나를 매우 좋아하셨다. 같이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나 장비들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여러 차례 만나며 나의 이야기를 듣고는 신촌의 작업실로 데려가서 그동안 그리신 그림도 보여 주셨다. 이처럼 나이 많으신 분들은 나를 많이 사랑해 주셨다. 나이 많으신 분 중에는 좋은 사람이 참으로 많다. 난 이런 분들 앞에서는 그냥 고양이 앞의 쥐다. 그런데 정회장님! 제가 그리고 싶은 그림은 회장님과 조금 다름니다.
난 평생 단 하나의 내가 만족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회장님은 거의 화가 수준이지 않습니까? 난 수십 장의 습작을 거친 완성된 하나의 작품을 남기는 것이니 좀 똥고집 화가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저는 회장님만 못해 지금은 그림 그릴 엄두도 못냅니다. 건강하셨으면 합니다.
이 외에도 교통사고가 더 있다. 나 자신을 놓고 보면 내가 운전으로 사고를 낼 만큼 기계나 자동차를 못 다루지 않는다. 첫 사고는 스쿠퍼 구입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나하고 춘석이 형 차 두 대에 팀원들이 타고 외식을 하려고 교외로 나갔다. 당시는 네비도 없을 때다.
곤지암인가 어디서 식사를 마치고 가면서 김주임이 앞장서 천천히 갈 테니 따라오라고 했다. 그런데 앞서 가던 춘석 주임이 속도를 내며 달리자 갑자기 커버 길이 나타났다. S자 코스 비슷한데 보통의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길이다. 주변에 인가도 없고 논과 산만 있는데 S코스 길 옆에 자동차 2-3대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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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저쪽에서 작은 봉고가 마치 나를 보고 달려오는 것 같다. 순간이지만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경찰이나 검찰은 잘 들어라. 99% 증거는 없지만 사건에서는 바로 이 순간적인 이상한 느낌이 매우 중요하다.
다시 말해, 세상 너무 쉽게 살지 말라는 소리다. 증거만 쫓으면 그 속에 진실은 없다. 누구는 증거를 만들며 사는데 경찰과 검찰이 증거만 쫓으면 일상을 사는 국민은 많이 힘들다. 그래서 자판기 소리를 듣는 것이다. 상대쪽에서 차가 달려오면 멈추든지 한쪽으로 피하는 것이 상식인데 이 사람은 나를 그 길옆 차량과 자기 차 사이로 몰아 넣는 느낌이다.
내쪽에서 모퉁이를 돌면 바로 S코스가 나타나 어쩔 수 없다지만 상대 쪽은 탁트인 곳이라 멀리서 보고 달려 왔기 때문에 얼마든지 피할 수가 있는데 오히려 더 달려 타이밍을 맞춘 것이다. 돌아올 때, 채재성이하고 같이 왔는데 “동배씨 조심해야겠어!”, “왜?”,
“이 사고 우연이 아닌 것 같아. 잘 생각해 봐! 길 옆에 그렇게 차가 서 있는 것도 그렇고, 갑자기 주임님이 동빼씨 따라오는 것을 알고도 달렸고…,” ‘은근히 이 놈이 똑똑했네!’ 하지만 당시는 이런 세상을 너무 몰라 그냥 무시하고 말았다. 뒤에 벌금형을 받아 대한민국 검사의 실적을 올려 주었다. 검사들이 좋단다.
대한민국에 살고 한글을 안다면 내 글은 반드시 정독해라. 뭔 억지 주장이냐 쉽겠지만 이 글을 읽지 않고 이 나라에 살면 모든 것이 헛수고다. 어릴 때는 순수했지만 지금은 매우 거만 해졌으니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마라. 장담컨대 이 글 정독이면 서울대 박사급이다. 세상은 학교라는 곳에서 주는 학위가 전부는 아니다. 솔직히 니가 박사라고 뭘 알겠니?
그 이후도 한세대 강의 마치고 일산대교를 건너 자유로를 탔다. 자유로는 다들 알겠지만 진입로에 차량이 정차 할 수가 없다. 그런데 내가 대교에서 자유로 쪽으로 내려가자 진입로에 각그랜저 한 대가 멈춰 있더니 순간 후진을 하며 내쪽으로 왔다. 후미등이 꺼진 상태로 분명 후진을 했다. 매우 넓은 진입로는 내차와 그 차 딱 두 대 밖에 없다.
사고 이후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지만 분명 그 차는 나를 보고 후진했다. 당시 난 뒤에서 차를 박으면 무조건 뒷차 잘못으로만 알고 있었다. 앞차가 고속도로 진입로에서 뒷차를 보고 후진 했다면 누가 내 말을 믿겠는가? 그래서 내려 “죄송합니다” 만 계속했다. 그러자 운전석 옆에 앉은 여자분이 “나 누군지 알아요?”, “죄송합니다.”,
“나, 누군지 몰라요?” 이후도 이 여자 분은 계속 자기가 누군지 아냐고 물었다. 그렇게 보험회사에 연락하여 처리했다. 얼마 후 보험회사 담당자의 연락이 왔다. “차 안에 있던 여자분 누군지 알아요?” 그 여자와 똑 같은 소리를 했다. “혹시 김추자라고 알아요? ‘님은 먼 곳에’ 가수인데…,”, “들어는 봤습니다”,
“그 여자분이 김추자입니다. 자신을 몰라봤다며 화가 많이나 합의하는데 힘들었습니다.” 했다. 남편분은 동하대 교수인데 그날 운전했다. 난 그것이 알고 싶다. 왜 그날 후진으로 내게 다가 왔는지…, 그 외도 몇 건의 사고가 더 있었는데 다들 비슷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누가 뭐래도 난 운전을 잘 하니까.
또한 내가 자꾸 말하면 변명만 되고 나만 계속 신병이 되니까? 나의 인생에는 좋은 스승이 참으로 많다. 고등학교 스승인 순이 선생님, G전자 김부사장님, 한성대학교 박학장님 이분들은 모두 나에게 너무도 과분한 분들이다. 아마도 다들 자기가 최고라 하겠지만 단연코 이 두 분은 비길 사람이 없다. 서울과기대 나교수님, 서울대 황교수님은 좀 과하게 표현하면 부모 이상이다. 내가 방금 부모를 버렸나?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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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수업이 좀 일찍 끝나서 동기들과 신나게 하교 하는데 어둑어둑한 건물 입구에서 나이 좀 있는 여교수님이 새로 오시는지 차에서 많은 책을 내리고 있었다. 다들 그냥 지나치는데 내가 “새로 오시는 교수님이십니까?” 하자, “응, 오늘이 첫날이야” 했다.
“아이고 교수님! 새로 오시는데 학생들이 가만히 있으면 안 되지요.” 하면서 동기들 몇 명을 불러 책을 모두 날라 드렸다. 난 산업대에 편입했지만 학생들 중에는 유한대학 동기들이 많다. 학교는 2년 다녔지만 학생들은 대부분 나하고 같이 4년을 다녔다. 그래서 사실상 여러 동기들과 4년을 같이 공부하여 서로 가깝게 지냈다.
이후 난 서울 대학으로 모든 학점 등을 가지고 다시 편입했다. “야! 교수님이 책을 들고 다니면 되냐? 전부 이리와!” 하며 내가 앞장서 책을 연구실까지 옮겨 드렸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교수님은 이후 10여년 동안 그 학생이 나라는 사실을 모르셨다. 난 공업디자인과지만 시각디자인과 CI디자인 과목을 수강신청 했다.
첫 수업에 들어갔더니 바로 내가 책 날라주었던 그분이다. 이도 한참 뒤에 알았지만 이분은 호산대, 대승고 등 명문 사학의 손녀다. 난 주제를 부산은행으로 잡았다. CI 수업을 하면서 로고 먹작업을 했다. “공업디자인과 학생은 이런 작업이 처음이지?” 하시더니 시각디자인과 학생들에게 좀 가르쳐 주라며 큰소리로 말했다.
원래 목소리가 좀 크기도 하다. 앞의 학생들을 봐 주시다가 제일 뒤에 있는 내게 와서 로고 밑 작업을 보시고는 먹 작업하는 것을 가르쳐 준다면 해 보라고 했다. 난 붓으로 휙 돌리며 단 몇 초만에 완성했다. 난 원래 이런 것을 잘 한다. 앞에 말한 순이선생님, 김부사장님, 박대감님 이런 분들이 내 이런 모습을 보면 저 놈은 원래 저런 것을 잘 한다며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모두들 이런 나를 보면 너무도 당연한 결과로만 알 것이다. 그런데 나 같은 사람을 처음 만난 나교수님은 매우 놀라는 것 같다. 순간 교수님은 내가 뭘 잘못봤나 하는 것 같았다. 좀 부가 설명하자면 서울대 출신인 그 잘난 우리 나교수님도 몇 분은 걸리고 또한 결과물이 나만큼 뛰어나지 못할 것이다.
나교수님은 한구일보에서 편집 일을 하여 먹 작업은 나름 자신 있는 분인데 방금 본 정동배는 마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인 것 같다. 나교수님! 그것은 원래 내가 잘 하는 겁니다. 앞의 분들에게 물어보면 다들 그럴 겁니다. 서울대가 아니라 하버드 박사 열 개를 받아도 그것은 정동배와 게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한참을 멍히 있던 교수님은 갑자기 앞으로 가시더니 시각디자인과 학생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은 4학년인데 어떻게 공업디자인과 학생만도 못하냐?’ 며 화를 냈다. 그건 원래 내가 잘 하는데…, 이후 진도를 좀 더 나가 초안을 완성했다. 교수님 보시기에 기가 찬 모양이다. “정동배 학생! 이 작품 반드시 완성해!
이번 시각디자인과 졸업 작품전 제일 앞에 학생 작품을 전시 할거야. 시각디자인과 전시라고 시각디자인과 학생 작품이 항상 앞에 있어라는 법이 어디있어? 내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니 꼭 마운트 작업까지 마무리 해, 필름 작업 끝나면 나한테 컴펌도 받고 우리과 학생들들도 반성 좀 해야 해” 하시며 나를 보면서 에너지가 더욱 넘치는 것 같았다.
그 때의 부산은행 초안 CI디자인도 첨부에 있다. 마치 나를 보면 학생 뿐만 아니라 시각디자인과 교수님들 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는 둣했다. 그런데 얼마 후 내가 중남미 2달 출장이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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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마운트 작업을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사실 마무리를 못할 것도 없지만 컴펌 받고 작품을 제출 할 방법이 없다.
출장을 마치고 1월쯤 필름 작업을 마무리하여 교수님께 연락했다. 동부이촌동 자택으로 오라고 했다. 필름을 마루에 펼치자 교수님은 “어쩌면 좋아. 어쩌니” 계속 이 말만 되풀이 했다. “뭘 말입니까? 부족한 부분을 지적해 주시면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하자 교수님은 졸업 작품전도 끝나고 성적도 끝났는데 지금 이걸 가져오면 어떻하냐는 것이다.
“괜찮습니다. 전 성적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교수님께 컴펌 받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 온 것입니다.” “내 너 출장 가는 것도 알고 있었는데…, 지금 오면 어쩌니” 교수님은 내 필름에 매우 흡족했지만 해 줄 수 있는게 없어 미안해 하시는 것 같다.
난 애써 괜찮다고 했고 내가 온 목적은 약속을 지키는 것이고 수업이 끝나도 교수님께 배울 것이 있어 왔음을 분명히 했다. 난 성적보다 실력주의다. 사실 평생 성적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교수님의 염려가 오히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나교수님과 학생으로서의 인연은 끝났다.
난 집이 경기도 화정인데 주말이면 이촌동까지 차가 뻥 뚤려 거리는 좀 있지만 온누이교회를 다녔다. 교회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 맞은편에서 신호 대기 중이다. 나교수님이었다. 나에 대한 인상이 강했는지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야, 너 아직도 G전자에 다니니?” 내가 G전자 다니는 것까지 기억하고 있다.
둘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그래 전자제품 말고는 뭘하고 싶어?” “저는 제 사업을 할 겁니다. 제품 보다는 가로등이나 공원, 저수지, 지도, 도로, 인테리어 이런 것 말입니다. 어릴 때부터 이런 것 그리는 걸 좋아했습니다.” 했더니 나한테 딱 맞는 곳이 있다며 서울대 환경대학원을 소개했다. 그때부터 환경대학원을 위한 특훈이 시작됐다.
교수님은 교회에서 주말이면 자료를 구하여 나에게 주고 난 관련 실기나 전문서적 등을 공부하여 확인 받기도 하고, 영어는 어차피 혼자해야 하니 계속하라고 푸시했다. 이런 특훈이 몇 개월 지나고 드디어 시험치는 날, 난 한 시간 정도 엎드려 컨디션 조절을 하려고 2시간 쯤 일찍 도착했다. 시험 장소는 서울법대 대강당에서 실시했다.
운동장을 지나 법대 쪽으로 꺾어지는데 갑자기 관악산과 서울대 정문이 내게로 다가오더니 어깨를 꽉 눌러 다리가 확 풀려 버렸다. 내가 잔재주 좀 있다고 서울대에 원서를 냈다는 사실을 스스로 받아 들이지 못했다. 거의 기다시피하여 다시 운동장쪽으로 내려와 조경석에 걸터 않았다.
그 정문과 관악산의 무게에 몸을 움직 일 수가 없어 대락 1시간을 멍히 있었다. 다른 수험생들이 올라 오는 것이 보였다. 시험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시험장에 도착해 겨우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의외로 영어 시험이 쉬웠다. “이 정도면 합격하겠는데…,”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영어 사전을 꺼내 시험 문제를 다시 풀어 보았다. 헉! 모든 단어 뜻을 사전으로 찾고는 이만 저만 실망을 한 것이 아니다. 서울대 문제가 이렇다는 것은 직작에 알고 있었지만 막상 사전으로 찾고 보니 정확히 알 수 있는 답이 거의 없다. 아주 쉽게 생각했던 문제도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달랐다. 이런!
몇 년 후 영어 공부하면서 당해 출제문제와 답을 구하여 비교해 보았다. 운이 좋았는지 그동안 내가 본 영어 시험 중에서는 그래도 꽤 잘 맞춘 편이었다. 발표 날 참으로 긴장했다. 사람이 없는 시간을 이용해 서울대에 전화를 했다. 수험번호를 누르자 합격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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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생활 중이라 아무에게 말도 못하고 2차를 준비했다. 2차는 서류전형과 면접이라 이력서, 포트폴리오, 자소서 등을 준비해야 한다.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서울대는 전문대학원이 3개가 있다.
보건전문대학원은 연건동에 있고 행정전문대학원은 주말 반으로 야간 비슷하다. 하지만 환경전문대학원은 사실상 주간으로 서울대 유일한 전문대학원으로 볼 수도 있다.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예체능은 1년에 1명 정도의 T/O가 있다. 내가 아는 타대학 예체능계 출신이 서울대학원에 들어간 것은 미대 2명, 환경대학원에 내가 2번째 정도로 알고 있다.
그러니까 서울대 개교 이후 모두 4명 정도가 전부다. 얼마나 특이했으면 1년에 십수 명이 어떻게 들어 갔냐며 나를 찾아왔다. 뿐만 아니라, 서울대 교수 중에도 98년쯤 연대 의대 출신이 처음으로 서울대 교수가 됐다고 교내신문에 실릴 정도다.
그만큼 서울대는 밖에서 생각하는 것 보다 더 폐쇄적이다. 우리나라는 대학이 500여개나 되니 이런 학교 하나 정도 있는 것도 좋다고 본다. 대한민국이 사회주의 국가도 아닌데 모두 똑 같을 필요는 없다. 난 주로 수출을 많이 다루어 해외를 여러 차례 나갔는데 국제사회에서의 서울대학교나 그 출신들의 위상은 국내에서 보다 더 대단하다.
당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송상현 국제사법재판소 소장 등도 서울대 출신이다. 한 번은 미국에서 당해 최고의 의학자 열 몇 명을 언론에 실었는데 그 중 4명이 서울대 출신이다. 물론 이들도 대학원은 하버드와 존스홉키스 출신으로 소개됐다. 최종 합격하고 알았는데 내가 시험 칠 때 서울 미대생 2명이 응시 했지만 모두 영어에서 탈락했다. 그래서 운 좋게 내가 합격했다. 그 친구들이 영어를 잘 했으면 어이쿠!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합격 소리에 나교수님이 불러 감사 기도를 했다. 나교수님은 기도하며 눈물을 펑펑 흘렸다. 천성을 보면 기도 할 때 잘 울 것도 같다. 암튼 누군가 내 일에 진심으로 이렇게 감사하는 것은 나교수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심지어 어머니께 서울대학원에 합격했다고 했더니 “그런데는 뭣하러 가냐? 돈이나 벌지!”했다.
나교수님은 그동안 제자를 여러 명 보냈으나 모두 영어에서 탈락 했다. 아무튼 나를 위해 기도하는 나교수님께 그만 반하고 말았다. 이 때부터 우리 나교수님은 항상 우리 정동배, 우리 정동배 하셨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조금이라도 안 좋게 말하려 하면 엄청나게 혼내며 두 번 다시 그런 생각 자체를 못하게 할 정도로 우리 정동배가 됐다.
나교수님은 내가 자랑스러워 호식대를 설립하신 초대 이사장님을 소개 시켜주시기도 하고 현직 이사장님, 그 가족들과 수차례 남원까지 함께 하기도 했다. 사실상 난 호식대 가족들의 준페밀리쯤 된다. 아마도 내가 요청하면 이사장님은 학과를 만들어서라도 교수자리 정도는 주실 것이다. 지금 만나도 모두 잘해 주실 것을 믿는다.
이쯤이면 다들 내 소식을 궁금해 하실 것이다. 사천 사람들은 뭔가 많이 착각하고 있다. 내가 서울에서 내려간 것은 감당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아서다. 또한 곧 모든 소송이 끝날 것이라는 착각도 있었다. 나교수님은 내가 내려간다는 소리에 현금 백억을 줄 테니 결혼하자고 했다. 우리 나교수님!
그 외에도 유명 연예인과 강남의 부잣집 딸 등 수백억 재력가에서 사위로 받고 싶어했다. 바로 이런 일련의 일들을 감당 할 수가 없어 내려가 스스로를 정리하고 싶었다. 이런 것을 보면 대법원 판결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늠된다. 물론 이는 법학 일반론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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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대선 후보 이회창이 정동배로부터 두 번의 표를 받고도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한 것은 대법원장일 때 국민의 소리를 듣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는 내가 들은 바가 있어 하는 소리다. 반면 양승태 대법원장님은 그 반대다. 난 박원홍 의원 소개로 이회창을 한 번 만났는데 조교 영팔이는 악수를 하고 다리가 후들거린다더라. 그 성격이면 죽는 날까지 국민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대법원까지 올라가서 억울하게 패소한 사건 한 건이면 지지자 수백 어쩌면 수천의 표를 갈아 먹고도 남는다.
이는 단순한 표가 아니라 절대적 적의 관계로 목숨을 걸고 이회창 당선을 반대하는 표다. 그럼 난 양승태 대법원장님 페이스 메이커가 되야하나? 하하! 아마도 이회창 열성 지지자가 주변에 있으면 투표 하고도 그 피해자 앞에서는 이회창 찍었다는 소리를 못 할 것이다. 이것이 민주주의다.
그렇게 귀를 닫고 살았으면 정치에 나서지 않는 것이 좋다. 아마도 내가 가는 지금 이 길이 그 억울함을 풀 수 있는 개척의 길이 될 것도 같다. 물론 추론이고 확정은 아니다. 이런 말을 하다보면 김대중 대통령이 천재라는 말을 자꾸 하게 되어 진짜 조심하고 있다.
노태우 정부 때 노동자들이 데모를 많이하여 그 노동자 대표를 청와대로 불러 대통령은 노재봉 총리께 이 문제를 일임 했을 수도 있다. 노총리는 원칙만 고수했고 노동자 대표는 권리 주장으로 결국 토론은 파행으로 끝났다. 이후 우연히 노총리와 토론했던 당시 노동자 대표 중 한 명을 만났다.
내가 노총리를 모시고 있다고 하자 갑자기 이 사람 목소리가 하이톤이다. 노총리는 콱 막히고 답답한 사람이라며 도대체 대화가 안 된다는 등 뭐라 설명이 안 된다며 화를 냈다. 그래서 내가 노총리께 같은 사실이 있냐고 물었다. 난 원래 이런 스타일이다. 그랬더니 노총리께서 그런 일이 있었다며 노동자 대표들을 꾸짖었다.
법에 없는데 어쩌란 말이냐며 오히려 노동자 대표들에게 화를 냈다. 역시 난 그때 어렸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으로 우스워 말이 안 나온다. 다시 노총리를 만나면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세상은 설명이 즉시 안 되는 일들이 많다. 왜냐하면 반드시 오해를 불러오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이도 같은 문제다. 노총리 말대로라면 지금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당장 성문화된 법은 없어도 법의 기준에 맞는 논리나 령이라는 것이 있다. 결국 이 논리로 옳고 그름을 따져야 되는 것도 있다. 또한 국가보안법은 현행범이 아니면 모두 각하가 맞다. 따라서 공문서 위조도 공소시효 만료가 아니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각하된 것이 맞다.
난 지금 이 말을 국민들이 이해하라는 것이 아니다. 현직 윤석열 계약직 대통령이 이해하는지 궁금하여 글을 남긴다? 답답하여 현직 대통령께 주는 팁이다? 각하! 만약 당시 서울대 교수 출신 대한민국 인문학의 아버지가 아닌 지금의 기능올림픽 출신 정동배를 국무총리로 앉혔으면 노동자나 사용자 모두 만족 할 안이 충분했을 텐데…,
차라리 공부라는 것을 잘하여 함께 세상을 살려면 진짜 깊이 있는 디테일을 배우려는 시늉 정도는 해야 되는 것 아닌가? 윤석열 대통령께는 적어도 이 사건이 끝날 때까지 김연자의 아모르파티만 듣기를 권장한다? 아! 이제는 다 아시는 것 같다. 서울대학에서 서울산업대는 모든 것이 부족한 낙인이다. 첫날 수업은 유교수님 수업이다. 밖에서는 감히 만날 수도 없는 대단한 분이다. 나는 이런 휼륭한 분의 수업을 듣는 것이 너무 뿌듯했다. 일반 학력만 놓고 보면 초졸이라 보기도 애매한 놈이 서울대 교수의 수업을 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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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들도 열의가 대단했다. 나 빼고 모두 녹음기를 앞에 두고 수업을 들을 정도다. 만만치 않는 성격의 소유자 유교수님은 강의실에 들어 오시며 마이크를 모두 치우라고 화를 냈다.
출석을 불렀다. “장영돌! 누구 교수님은 잘 계시냐?”, “예”, “오정혜! 누구 교수님과 어제도 만났어” 등 서울대 출신들과 부산대 등 지방 명문대생, 미국 유학파 등 출석을 체크하면서 서로 안부도 물었다. 난 가나다 끝이라 마지막 순서다. ‘정동배’ 하면 ‘예’ 하고 큰소리로 답하고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려고 준비했다.
마지막이 내 차례다. 그런데 교수님이 갑자기 출석부를 던져버렸다. 그리고 창문쪽으로 가서 규장각을 지긋이 응시하시더니 작지 않는 목소리로 모두가 들리게 한마디 하셨다.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서울대학이 개나 소나 들어오는 학교가 됐어” 이렇게 꿈에 부푼 서울대학교 첫 수업에서 난 개가 됐다. 멍멍!
그날 집으로 돌아와 정말 고민 많이 했다. 유교수님을 원망 해서가 아니라 그 휼륭한 동기들에게 누가 되고 교수님들을 실망 시킬까봐 중도 포기도 신중히 검토했다. 출석을 빼면 교수님 수업은 너무 좋았다. 바로 이렇게 배워야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첫 수업 끝날 때쯤 유교수님은 선배 중의 한 명이 영종도 공항 일부를 직접 설계하여 교수님께 자랑하려고 도면을 한 장 가져왔다며 다음 주까지 이를 그려 오라고 했다.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동기들 중 나이가 가장 많은 경신이에게 물었다. 문방구에 가서 롤로된 트레이싱페이퍼를 구입해 그 위에 놓고 그려 오면 된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와 인근의 문방구를 찾았다. 건축용 트레이싱페이퍼가 없었다. 나의 집은 그동안 장려금, 심사, 직장 생활, 프로젝트 등 수익으로 매매했고 신도시라 환경이 좋다. 집에는 전문가용 제도판도 있고 성능이 뛰어난 컴퓨터도 있다. 하지만 주변에서 그런 용지를 구할 수가 없어 일반용 전지 트레이싱페이퍼를 구입해 제도판에 걸었다.
첫 수업에서 교수님이 말씀하신 거의 모든 내용을 정리하여 영종도 도면에 대입시켰다. 그리고 이를 전부 새롭게 그렸다. 선배님의 설계를 완전히 바꾸어 유교수님 수업 내용에 맞췄다. 다음 시간에 동기들은 어디서 똑 같은 트레이싱페이퍼를 구해와서는 대부분 선배님 작품을 그대로 그려 놨다.
이를 십수장 벽에 쫙 붙였다. 하지만 내 것은 그 크기가 배 이상 크고 색도 하얂다. 유교수님이 들어 오시더니 동기들 작품을 하나씩 보시며 “이것 떼”, “이것도” 전부 떼고 나니 내 것만 남았다. “호!” 하시더니 “이건 누가 그렸어”, “제 것입니다”, “나와서 설명해 봐”,
“입구에 들어서면 언덕 넘어서 물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면 물소리가 호기심을 자극해 자연스럽게 동선으로 연결됩니다. 분수대 뒤편은 낙엽수를 심고 아래는 펜지 등 겨울에 피는 꽃을 심어 연상 효과를 줍니다.” 줄줄이 설명했지만 이는 앞시간에 유교수님이 설명한 모든 내용을 그대로 접목시킨 도면이다.
어떤 측면으로 보면 유교수님 수업의 스폰지 같은 제자다. “호!” 발표가 끝나자 유교수님은 말을 잇지 못했다. 바로 전 시간에 유교수님이 가르쳐준 것인데 뭐라 하시겠는가? 한편으로는 기분도 좋아보였다. 그렇게 유교수님 수업을 스폰지처럼 배운 학생을 처음 본듯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교수님 수업을 듣고도 다른 책이나 논문에서 답을 찾는 경우가 많은데 지금 동기들은 이도 아닌 선배님 작품을 거의 그대로 빼끼는데 그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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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난 가운데 큰 연못까지 전부 바꾸어 버렸다. 바로 전 시간의 유교수님 수업 내용대로…, “호!”. “호!” 유교수님은 연일 호호를 하시더니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
“자네 공무원하다 왔나?”, “아닙니다”, “그런데 왜 공무원 처럼 발표 해!”, “어디 있다가 왔어?”, “G전자 디자인연구소에서 일하다가 왔습니다.”, “호! 나도 말이야. 요즘 캐드를 배우고 있어. 내 연구실에 매킨토시도 있어. 한 번 따라와 봐” 하시며 연구실에 있는 매킨토시를 보여 주셨다.
“어때! 필요하면 와서 써도 돼”, “매킨토시는 어디 있습니까?”, “여기 있잖아”. ‘유교수님! 벌써 27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니 솔직히 말씀드립니다. 서울대학교는 학생과 교수님, 책은 확실이 뛰어납니다. 하지만 시설은 13년 전 부산기공이 서울대학교 보다 몇 배는 더 좋은 것 같습니다.
난 서울대 시설이 그렇게 낙후된 것을 보고 매우 놀랬습니다. 사실 엄청난 대학에 들어 온 줄 알았거든요. 교수님께서는 그 도면을 내가 캐드로 그린 줄 알고 계셨지만 사실 제 손으로 그린 초안입니다. 그 위에 트레이싱지를 올려 로터링펜으로 완성합니다. 부산기공은 손으로 캐드 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도면을 그릴 줄 아는 학생들이 수두룩합니다.
우리는 엔진 같은 것을 보면 바로 3각법과 단면도, 정밀도 등이 그려지며 거의 정확하게 규격 도면으로 구현해 냅니다. 수백 명의 학생들이 모두 각자의 전용 전문가용 제도판을 가져있고 그 연습량은 엄청납니다. 단지 고졸일 뿐이죠. `82년도에 1인당 컴퓨터가 한 대씩 주어졌으며, 기계과는 당시 수천만원씩 하는 장비가 각 학생 1인당 한 대씩 주어집니다. 900명 학생 전원에게 말입니다.
그런데 국립서울대학교가 겨우 컴퓨터 십여 대에 250여 명이 매달려 있지 않습니까? 또한 교수님 연구실에서 매킨토시를 바로 찾지 못한 것은 사실 난 그런 매킨토시가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살짝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G전자에서는 수천만 원씩 하는 큰 모니터의 매킨토시가 여기저기 널려 있고, 알리아스는 당시 가격이 수억이 넘습니다.
이런 컴퓨터도 언제든지 사용 할 수 있게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 장난감 같은 매킨토시를 자랑하면 제가 얼마나 곤란했겠습니까? 지금쯤이면 후배들의 교육환경이 많이 개선 됐으리라 기대합니다.’ 물론 대부분 고시나 박사 등이 목적이고, 그래서 나 같은 놈이 수석도 했겠지만…,
난 서울대서 학생으로 배우기도 했지만, 아무튼 세상은 모순 덩어리라 생각 한다. 예를 들어, 비행기 한 대를 모두 분해하여 도면으로 구현하라면 서울공대 박사 열 명 정도가 모여 1년 이상 걸려야 가능 할 것이다. 내가 너무 무시했나? 더 빨리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부산기공 출신 나 같은 사람은 단 한 명이면 몇 개월 만에 완벽하게 완성 가능하다.
도대체 누가 고졸이고 누가 대졸이란 말인가? 나경원 의원만 봐도 그렇다 지금 상황은 진짜 매우 쪽팔리거나 아니면 아주 두려운 것이 맞다. 그런데 아직도 얼굴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면 저게 사람이야 철면피야 쉽다? 진짜 내가 서당개로 있던 같은 건물의 서울법대 출신이 맞는지 궁금하다. 법에 대한 이해가 좀 많이 부족한가?
내가 법 입문부터 강의 좀 해줄까? 지금 진짜 진짜 쪽팔리거나 무서워 벌벌 떨어야 하는 상황이거든…, 아무렇지 않으면 그동안 나의원이 판결한 피고나 원도들은 다 뭐데? 최소한 최병렬 전)대표처럼 수그리고 있을 줄은 알아야 염치거든? 도대체 이 나라에서 배웠다는 기준이 뭐야? 철면피면 많이 배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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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이렇게 첫 시간의 개는 유교수님의 자랑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다음 주에는 그 도면으로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하라고 하셨다.
동기들도 투명인간 정동배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다. 다시 집으로 가서 발표 준비를 했다. 난 전 시간에 충분히 발표를 했기 때문에 어떻게 다시 준비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감도를 그려 가기로 했다. 별도의 그림 도구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도화지 전지를 구해 도면 대로 그리면 될 것 같다.
중고생 수채화 물감과 학생들 싸구려 붓을 구해 전지에 조감도를 그렸다. 수업시간에 큰 조감도를 그려 놓으니 굳이 발표가 필요 없다. 동기들은 전날 도면에 지시선을 그어 이렇게 된다며 유사 사진을 붙이는 흔한 방법을 거의 똑 같이 해 왔다. 이쯤되니 이제 동기들이 나를 의식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다음 과제로 홍난파 생가 설계를 했다. 생가를 방문한 후 다음 주에는 각자 발표 준비를 하라고 하셨다. 이번에도 전지에 큰 조감도로 발표 준비를 했다. 역시 교수님은 매우 좋아하셨고 나에게 발표 기회가 주어졌다. “이곳이 주차장입니다. 차를 주차하고 계단을 올라가며 연상효과를 가집니다.”
그렇게 생가를 둘러보고 내려가기 위해 주차장 쪽을 보면 주차장을 둘러싸고 있는 메타를 보게 되는데 이것이 곧 바이올린 형태라는 것을 알게 되어 홍난파가 우리나라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것을 상기(想起)한다는 내용이다. 역시 교수님께서 매우 만족해 하셨고 다음 주에는 모형을 만들어 오라고 하셨다.
난 그렇게 부족하지 않는 모형을 만들어 가져갔다. 동기들은 내가 어떻게 해왔는지 궁금하여 법대 입구로 내려와 나를 기다렸다. “형! 동배! 이번에는 어떻게 했어” 모형을 보여 주었다. “내가 잘 몰라 그러는데 이렇게 만들면 되니?” 동기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날 모형을 만들어 제출한 학생도 나 밖에 없었다. 난 동기들도 좋았고 교수님들도 좋아 열심히 했는데 동기들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이후 퇴촌 쪽으로 답사를 가기로 했다. 난 1주일에 하루 여준대학으로 강의를 갔는데 바로 다음 날이 답사 계획 발표일이다. 동기들에게 전날 강의가 있다고 하자 이번 자료 준비에서는 빠져도 된다고 했다.
이제 동기들이 교수님의 인정을 받을 기회다. 유교수님은 답사도 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가지 않으시는 분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이 준비를 위해서도 최선을 다한다. 발표 당일, 전날 동기들을 돕지 못한 미안한 마음으로 아침 일찍 학교에 갔다. 작업실 문을 열자 정혜가 화를 냈다.
정혜는 얼굴이 하얂고 예뻤지만 말을 약간 컹컹거렸다. 그래서 난 없는 곳에서 ‘컹컹이’라 했다. 그런 정혜가 얼굴에 먹칠을 하고 머리도 헝클어져 도끼눈을 하며 나를 흘기고 있다. “동배!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내가 이걸 담당해 어제도 밤새고 오늘도 꼬박 밤새 일하고 있는데 동배는 이제 나타나?”
아무튼 우리 예쁜 정혜가 나를 잡아 먹을 기세다. “내가 어제는 강의가 있어 돕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건 아는데…, 그럼 좀 일찍와서 도우면 안돼”, “그래서 이렇게 일찍 왔잖아. 그러지 말고 뭘하면 되는지 말해라” 답사지역 약도를 그리는데 선이 삐뚤삐뚤하여 교수님께서 계속 리젝트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거의 울려고 했다.
서울대 교수님들은 걸어다니는 백과사전 등이다. 서울대학까지 와서 교수님들 말을 듣지 않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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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대부분 말을 조심하고 행동 할 때도 항상 주의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대하기 매우 편하다.
그런데 유교수님은 여기에 낭만과 반깡패 기질을 고루 갖추고 계신 분이다. 한 번 학생을 혼내면 여학생들은 울고 나가기 태반이다. 그러니 정혜 행동은 이유있다. 복사기 옆에는 A3지에 약도를 그려 A4지로 축소도 하고 플러스 펜으로 그리는 등 별 방법을 다 동원해 교수님 마음에 드는 약도를 그리려고 노력한 흔적이 혁혁했다.
“이게 그나마 결과가 좋은 거야. 내가 고생해서 만든 것이니 손대지 말고 다른 종이로 한 번 해 보든지. 내가 밤을 새서 봐! 세수도 해야하고 곧 교수님 오실거니까 씻고 올게” 하더니 나갔다. 난 플러스 펜의 끝을 약간 잘라내어 뭉뚱그려 그것으로 약도를 깨끗하게 그렸다.
대략 5분 정도 걸려 완성하고 정혜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동배(엄청 앙칼지고 화난 목소리) 이것 좀 그리라는데 그새 앉아 놀고 있어? 지금 교수님 들어 오시는 것 봤단 말이야” 하며 화를 냈다. 아마도 서울대학에서는 정혜가 나를 가장 많이 혼냈다. “아니, 너 나가고 내가 그려 놨는데”,
“뭐 내가 밤을 새며 그려도 안 되는데 잠깐 씻고 온 사이에 다시 그렸다고” 눈을 째리며 나를 위아래로 흘겼다. 난 정혜가 황교수님 보다 더 무서웠다. 그래서 내가 그린 약도를 보여 주며 “이게 내가 그린 거야 역시 마음에 안 들지?” 하자 정혜는 눈이 동그래 지더니 “이건 내가 그린 거고 이게 동배가 그린 거란 말이지”
암튼 방금 세수하고 온 정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눈치다. “이게 동배가 그린 거야” 몇 번을 묻고 쳐다 보더니 “방금 오면서 교수님 오시는 것 봤어. 내가 가서 교수님께 컴펌 받고 올게” 하더니 내가 그린 것을 들고 나갔다. 얼마 후 돌아온 정혜는 풀이 푹 죽어 있었다.
“왜 교수님이 마음에 안든데…, 줘봐 내가 가서 무엇이 문제인지 여줘보고 다시 그릴 게” 하자 “아냐” 하며 얼굴을 바닥으로 툭 떨어트렸다. 나를 지보도 않고 “동배야! 교수님 컴펌났어” 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힘이 없어 그럼 다음 할 것은 뭐야 내가 할게”, “아냐 동배가 그린 게 교수님 맘에든데. 내가 이틀을 밤을 새웠는데…,”
당시는 이 일련의 일들이 정혜에게 그렇게 충격이라는 생각을 전혀 못했다. 그냥 밤을 새서 얘가 힘들어 하는구나 정도만 생각했다. 그렇게 다른 과목들도 최선을 다하고 학기를 마쳤다. 학생들 성적 처리도 마무리하고 다음 학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있었다. 바쁘게 살아온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느끼는 여유 같은 것이다.
거실은 따스한 햇살이 여기저기서 비집고 들어오며 나를 반기고 전)부인은 밥을 준비하니 곧 먹으면 된다.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생각하며 거실에 누웠는데 전화가 왔다. “정동배씨죠? 서울대학교인데 몇 일이 졸업식이니 참석하셔요” 난 이 소리를 듣고 크게 웃었다. 조교는 매우 기분 나쁜 소리로 “왜 웃으시죠?” 했다.
“아뇨 정동배라는 이름이 그렇게 흔한 것은 아니잖아요? 사실 난 이 나이 먹도록 정동배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요?”, “아니, 서울대학교에 그것도 환경대학원에 정동배가 한 명 더 있다는 뜻이 잖아요?”, “무슨 소리입니까?”,
“저는 1학년 정동배이지 졸업생이 아닙니다.”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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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학번 정동배씨 아닙니까?”, “어! 거건 내 학번 맞는데…,”, “아! 정동배씨가 이번에 수석하셔서 장학금 수여가 있으니 재학생 대표로 00일 졸업식에 참석하시라고 전화드렸습니다. 그러니 몇시까지 꼭 참석하셔요.” 하며 끊었다.
난 뭘 잘못 들은 줄 알고 멍히 있었다. 전)부인이 어디서 온 전화냐며 물었다. “서울대학교인데 내가 수석했다고 학교에서 오라는데…,”, “누가 수석해” 말도 안 되는 소릴 한다며 크게 비웃었다. 그래서 나도 잘못 온 전화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자 걱정이 됐다. 만약 사실이면 교수님들이 나를 얼마나 건방지게 생각 하겠는가?
한참을 고민하다가 졸업식 날 가서 분위기를 살피기로 했다. 차를 입구쪽에 세우고 거의 숨다시피하며 졸업식장으로 갔다. 식장 앞의 베너 뒤에 숨어 식순 등을 찾았다. 그곳에 이름이 있으면 진짜지만 없으면 빨리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만약 아니라면 수석했다는 잘못된 정보로 학교를 찾은 나를 보고 교수님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베너 뒤에 숨어서 얼굴을 삐쭉 삐쭉 내밀며 살피고 있는데 조교가 오더니 “정동배씨죠? 000조교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하며 베너 뒤에 숨은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며 식장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 가는데 교수님들이 옆 문에서 줄줄이 나오셨다.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았았다. 우와! 교수님들 포스 장난 아님! 황교수님께서 오시더니 “축하해!” 하며 악수를 건넜다. 그때서야 ‘아! 진짜구나’ 하며 안심이 됐다. 그렇게 난 또 한 번 역사를 썼다. 아마 황교수님은 당신이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난 황교수님 말을 듣기 전까지는 진짜 마음 고생과 속 알이를 엄청 많이 한 수석이다. 초등학교 받아쓰기부터 공부를 해서 1등이라고는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내가 서울대학교에서 그 쟁쟁한 동기들을 모두 물리치고 1등을 한 것이다. 난 초중고, 대학을 다니면서 성적에 신경을 써본적이 정말이지 한 번도 없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성적을 받고 부모님께 편지를 한 번 쓴 적은 있다. 이는 성적 때문에 보낸 편지가 아니라 힘들게 사시는 부모님이 걱정 되기도 했고, 학교에서 강제로 편지를 쓰게하여 별 할 말도 없고 하여 성적 이야기를 딱 한 번 한 것이 전부다. 난 차남이지만 사실상 장남으로 자랐다. 초등학교, 중학교 다니는 동안 줄 곳 동생들을 돌봤고 아버님이 아파서 농사 등 집안 일도 혼자 도맡아 했다. 그래서 부산에서도 부모님 걱정을 많이 했다. 대학도 다니는 4년 동안 한 번도 성적표을 읽어 보거나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
그러니 안경이나 지순이가 1등을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정동배가 1등 하는 것은 리얼 천지가 개벽 할 일 아닌가? 개학을 하자 나의 수석은 이미 모두에게 알려져 있었다. 이 때 같은 건물의 법대는 이탄희 의원이 수석했다. 정혜가 좀 보자고 했다. 법대 건물 옥상으로 데려가더니 철문을 잠궈버렸다.
순간 별 생각을 다했다. ‘이렇게 예쁜 정혜가 나를 좋아하는 것은 아닐텐데…, 난 유부남이데…,’, “컹! 동배! 나 동배 때문에 자괴감이 들어” 좋아 한다는 것은 아닌 것 같아 안심이 됐다. “그래 내가 뭘 잘못 했나 보구나 그럼 말해 주라 내가 고칠 테니”, “동배는 그게 문제야 세상을 아무 것도 몰라. 내가 동배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 알아”
‘어! 좋아하는 것 맞나?’, “이쪽으로 와 봐” 그러면서 법대 건물 옥상 끝으로 나를 데려갔다. 큰 건물은 아니지만 상당한 위협감이 드는 위치다. “동배는 내가 여기서 확 뛰어 내렸으면 좋겠어?” 이젠 무섭다. “정혜야! 내가 뭘 잘못했는지 말해라. 그럼 내가 다 고칠 게”, “동배는 그게 제일 문제라니까? 내가 왜 이러는지 정말 몰라? 난 강남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어, 중학교 때도 항상 전교 1등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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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서도 항상 전교 1등을 했어. 알아! 서울대학교 들어와서도 과에서는 항상 1등 했어. 그런데 동배를 만나고는 삶에 자괴감도 들고, 절대로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것을 알았단 말이야”, “그래, 정혜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앞으로 더 노력 할께”. “동배는 말이 안 통해 그러니 내가 말을 하면 뭘해. 내가 학교 관두면 다 동배 때문인 줄 알아, 알겠어!”
당시는 참으로 이해 할 수가 없다. 내가 아는 정혜는 이쁘고 똑똑하고 성격도 좋은 줄 알았는데 왜 날 싫어하는 언행을 하는지 모르겠다. 한참을 설명하던 정혜는 더 이상 말이 안 통한다며 내려 가자고 했다. 솔까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됐던 것일까? 한참 학기가 진행되는데 정혜가 보이지 않았다.
“수지야! 정혜가 안 보인다.”, “동배한테 다 말했다던데…,”, “뭘?”, “정혜, 동배 때문에 종노학원 들어갔어” 도대체 서울대생이 갑자기 종노학원은 또 뭔 소리야? “동배 때문에 수능 다시 보기로 했다던데…,” 이후 정혜는 수능을 다시 봐 연쇠대 치대를 들어가 지금 대치동에서 치과 의사를 하고 있다.
정혜는 무엇으로 보나 나보다 뛰어난 학생이다. 그런데 한 번 성적에서 밀렸다고 다른 길을 찾는다. 와! 서울대생 무섭다. 주변에 서울대 출신 있으면 건드리지 마라. 어떻게 해서든 다른 길로 가서라도 어차피 너 위에 올라 설 들놈이다. 나도 건드리지 마라. 반쪽이라도 서울대 출신이다. 안경이가 모친상을 당해 국립서울의료원에 갔다.
안경이 어머님은 서울의료원 원장 정도 되는 분이었던 것 같다. 그곳에서 정혜를 만났다. “정혜야! 그럼 치기공은 직접하니?”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 뿐이다. “동배가 치과 의사하면 나보다 잘 할거야” 하며 고개를 숙였다. 정혜야! 너는 나의 자랑이다 어쩌다 내가 수석 한 것이지 어찌 그런 일로 내가 너보다 낫다고 생각하니?
사실 나도 어느 정도는 눈치가 있어 다음 학기부터 수석 안 하려고 무진장 노력했다. 좀 웃기는 이야기지만 말이다. 교수님들이야 나하고 너무 먼 사람들이지만 동기들은 평생을 함께 할지도 모르는데 내가 성적 잘 받는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겠니? 그래서 양교수님께 반항도 하고, 미대나 계획학과 수업도 듣고 그랬다.
내 동기들은 다 나보다 휠씬 뛰어나다. 난 단지 몇 가지 특출난 장끼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는 절대로 너희들이 뛰어 넘을 수 없는 것 또한 분명하다. 너희들은 고등학교까지 학원비 등 교육비로 얼마를 썼는데 나 같은 놈하고 비교를…,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난 우리 동기들 전부를 합친 것 보다 더 많은 교육비로 만들어진 사람이다.
단지 정규 교육과정이 아닐 뿐이다. 모르긴 해도 G전자에서는 구자경 회장이 구본모 회장 교육비로 쓴 돈보다 나를 위해 쓴 돈이 더 많을 것이다. 부산기공이나 국가대표가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삼성전자도 기능 선수 한 명이면 이재용 회장 교육비 보다 더 많은 돈으로 만들어 진다. 이러면 이해가 되려나? 미래는 어차피 스스로 일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노동자는 간섭을 싫어하고 사용자는 와중에도 이익 놓치길 싫어한다. 따라서 스스로 움직여야 하는데 그러려면 점들을 연결하는 능력 즉, 추론력을 길려야 한다. 내가 가장 잘 하는 능력이다. 서울대 출신들이 부족한 것 또한 바로 이 부분이다. 물론 서울대생의 모든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창의력 일부에 해당된다. 나의 창의력이야 그동안 박쥐들이 지켜봐서 잘 알겠지만 아인슈타인이나 에디슨도 혀를 내두를 정도 아니냐? 이는 팩트인데 믿어 주는 사람이 없다. 내가 홍난파 생가 주차장을 바이올린으로 설계하여 정상에 올랐을 때 돌아보면서, ‘와! 바이올린이다’ 라며 홍난파를 상기하게 한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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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더니 여러 동기들이 어느 나라 잡지에서 봤냐? 어느 논문에서 가져왔냐?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등이다. 난 그냥 홍시 맛이 났을 뿐인데…,
그 모든 논문, 책 등의 종결판이 서울대 교수님들이데 무슨 답을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나처럼 교수님들 말만 잘 들으면 되지? 책이야 필요하면 졸업하고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지만 교수님들은 후배들에게 물려 줘야하니 잠깐 지나가는 기회 아닌가? 난 교수님들 말 한 마디면 하버드 논문 열 편 보다 더 가치있게 생각했다.
서울대 교수님은 한 분만 알아도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아무거나 물어 보면 구글이 필요 없다. 검색창은 믿을 수가 없지만 교수님들은 확실한 보증 수표 아닌가? 무엇보다 모든 질문에 비용 청구가 없다. 내가 당시 공짜를 너무 좋아 했는지 요즘 머리가 많이 빠졌다. 그래서 교수님들이 어디를 가자고 하면 모든 것을 접고 따라 다녔다.
박교수님이 점봉산을 가자고 하면 지금이라도 다시 따라가고 싶다. 난 아직도 우리나라에 그런 산이 있는 것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 책으로 알프스를 본들 이런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 황교수님이 책 10만권을 정독하셨으면 그 엑기스를 나한테 말씀하시지 않겠는가?
여기에 내 생각을 더하면 된다. 따분하게 책은 무슨 책…, 난 서울대 중앙도서관에도 자주갔다. 중앙도서관에서 책을 보는 동문들을 보면 참으로 신기하다. 이들은 그냥 책 보는 것이 딱 천직인 사람들이다. 난 다른 대학이나 국립 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 심지어 미국 도서관 등 수십 곳을 다녀봤다. 참고로 국회 도서관은 항상 텅 비어 있어 좋다.
개인적으로 국회 도서관은 이런 것이 맞다고 본다. 암튼 책 보는 것이 이렇게 자연스러운 곳은 서울대 중앙도서관 밖에 없다. 만약 책이라는 것이 없으면 저 사람들은 뭘할까 싶을 정도로 매우 편안해 보인다. 일반인에게 통유리 관광 상품으로 팔면 분명히 돈 될 것이다.
쫙 깔린 자리에는 나처럼 졸고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난 도서관에 가면 제일 먼저 일단 엎드려 자고 본다. 그래야 정신이 돌아와 책을 볼 수 있어 어딜가나 똑 같은 의식을 치른다. 컨디션 조절이 되지 않으면 공부를 시작하지 않는다. 그런데 서울대생들은 그냥 앉아 있거나 누워있는 놈이 단 한 명도 없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물론 서울대생이 이런 유사 글을 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이런 일이 일상이기 때문에 나의 시선과 많은 차이가 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신기한 것이지 그들 중에는 이런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수백 명이 넘는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책보는 관경을 상상해 봐라.
책 속에 학생들이 들어가 있는 것인지 학생들이 책을 보는 것인지 혼란을 느끼는 것은 나 뿐이다. 책 읽은 자체가 매우 편안하고 행복한 사람들이다. 난 다른 대학의 도서관도 많이 가고 행정기관의 작은 도서관도 자주 갔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다면 대부분 영어 공부를 한다. 대충 보면 뭘 공부하는지 알 수 있다. 얼마나 뻔한지 가끔은 모아 놓고 강의를 하고 싶을 정도다. 가끔 그 부분은 이렇게 배우면 더 좋은데…, 생각하며 지나 가기도 했다. 하지만 서울대 도서관은 영어 공부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굳이 있다면 나 밖에 없다. 신기하지? 이 들놈은 언제 영어 공부하지? 일부러 대충 돌아다니면서 뭘 공부하는지 둘러 봤다. 와! 친미 들놈! 정말 어려운 책만 골라 본다. 이는 펙트다. 내가 중앙도서관을 찾는 이유 90% 이상은 딱 하나다. 국가 기능사나 기사 등 자격증 문제 출제용 참고 도서를 찾기 위해서다.
암튼 난 서울대 중앙도서관에서도 돈 되는 책들만 봤다. 문제 출제하면 한 문제당 얼마씩 돈이 된다. 하지만 다른 학생들은 전부 옆에서 봐도 뭘 보는지 모르겠다.
국가가 싼 똥은 국가가 치운다 080/240

그러니까 내가 상대하기 쉬운 들놈이다. 내가 그들을 모르는 것처럼 그들도 나를 모른다. 서울대 중앙도서관에서 나처럼 돈 번 놈! 손! 그냥 머리로 생각하면 될 일을 이들은 반드시 유명 외국 잡지나 논문 같은 곳에서만 답을 찾는다. 이들은 영어 논문만 보는게 아니다.
불어, 독이, 중국어, 일어, 이상한 나라 엘리스 말 등…, 한 번은 동기가 불어 전문서적을 일어로 빠르게 타이핑하는 것도 봤다. 교수님이 내일까지 끝내랬다나…, 난 겨우 영어 논문 한 편 읽으면 머리에 쥐가 난다. 진짜 거짓말 안 하고, 그 다음은 몇 시간 쉬어야 한다.
대부분 성격은 조용조용하고 평소에 말이 별로 없다. 무슨 설명을 할 때는 차근차근 말한다. 그런 후 보편적으로 한 번 쳐다 보고는 씨익 웃어준다. 뭐 굳이 의미 파악을 하자면 ‘이것을 설명해 준다고 니가 뭘 알겠니?’ 비슷하다. 나만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다.
난 가끔 논리에 맞지 않거나 거부감이 들 때면 다혈질이다. 나 같은 다혈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가끔 나 비슷하거나 더한 놈도 있다. 이들은 대부분 방송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이다. 학생이나 교수님들은 서로 누가누가 잘 났냐를 한다면 난 그냥 받아 들이는 스폰지다. 여기저기 다니며 교수님들의 행동부터 모두를 따라 하려고 노력한다.
또한 난 우리과 외에도 다른 단과대학이나 다른 전공의 교수님도 많이 알았는데 모두들 내가 관악산을 떠나고는 기가 빠져서 보약을 드셨을 것이다. 그만큼 난 교수님들의 거의 모든 것을 아빨 들이고 나왔다. 심지어 머릿 속의 지식 뿐만 아니라 행동거지도 많이 따라한다. 난 만학도지만 이런 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웠다.
자랑스런 동문상 같은 것 말고 ‘가장 말 잘 들었던 학생 상’이 있으면 반드시 1호는 내가 받아야 한다. 혹시 서울대 동문 중에 나보다 이 상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사람 있나? 그렇다면 너는 머리가 나빠 그냥 졸졸졸 따라 다닌 것 뿐이다. 동급에서 놀지마라.
윤석열 대통령님! 여당에 이래라 저래라 하거나 만나지 마십시오. 앞으로는 여야 합 300에 명령이나 지시를 하시면 됩니다. 궁금하시면 좌로 굴러 우로 굴러 한 번 시켜 보십시오. 아니면 한강까지 선착순 몇 명 하시면 알아서 잘 뛰어 다닐 것입니다. 아직도 머뭇 머뭇하는 금배지가 있으면 그냥 탱크로 밀어 버리면 됩니다.
요즘 가만히 누워 있으면 웃음이 실실 나오는 것이 행복해 미치겠지요? 왜 그런지 아십니까? 80억 상대로 정동배와 손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피타고라스, 아리스토텔레스, 갈릴레오 갈릴레이,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처럼 우리는 진실이 아니라 진리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윤석열 대통령님은 김대중이 싸고 문제인이 버린 똥 싫다고 싫다고 하다가 치운 것 아닙니까? 철학은 가끔 이렇게 즐거움을 주기도 합니다.
김현성 교수님은 동경 신주구 거리가 김박사의 동경대 박사논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매우 열린 분이다. 중간고사에서 도로의 문제점을 찾아 개선점과 함께 발표하라고 했다. 아마도 동기들은 전부 도서관에서 책으로 답을 찾았을 것이다. 난 집 근처의 교차로에서 하루 종일 메모지를 들고 직접 조사했다. 각 신호등의 시간을 모두 조사하고 점등 순서 등 문제점을 기록하며 보행자에게 매우 불리한 교통 시스템을 찾았다.
그리고 동시신호를 접목하여 보행자가 교차로의 대각선으로 바로 건널 것을 제안했다. 즉, 차량 중심에서 보행자 중심의 도로를 제안한 것이다. 김박사는 이게 마음에 든다며 내가 허락하면 서울시에 제안하여 적용 할 수 있게 하겠단다. 난 영광이라 했고 지금 도시 여기 저기에 내가 제출한 교차로가 운영중이다. 가끔은 방송이나 진주, 여기 수원에서도 볼 수 있다. 보행자 중심의 교차로는 앞으로 ‘동배보도’로 명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