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첨사 정발(鄭發 1553~1592) 자는 자고(子固), 본관은 경주(慶州) 1553년(명종 8년) 경기도 연천 출생 25세(선조 10년) 무과급제 선전관에 등용선조 24년 절충장군으로 부산첨사에 배명 1592년 4월 14일 장군은 검은 갑옷을 입고 노도와 같이 밀어닥친 수많은 왜군을 맞아 분전을 거듭하다 무인답게 장렬히 순절하였다.
성중 군민은 장군의 충의에 격발되어 너나 할 것 없이 죽음으로써 항전하다 모두 죽어갔다. 소수 군민의 항전이었으나, 매우 굳세어 성을 함락한 왜군은 그 분풀이로 군신(軍神)의 혈제(血祭)라 하여 개, 고양이까지도 죽였다. 난 후 잔혹한 왜인들은 [우리는 부산에서 크게 좌절되었다], [흑의장군이 가장 두려웠다]고 말할 정도로 첫 싸움에서 장렬한 전투를 치루었다. 묘소는 경기도 마전에 있다.
- 증직 : 시호는 충장 자현대부 병조판서,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부사맹(富司猛) 이정헌(李庭憲)
자는 수경(守卿), 본관은 공주(公州).
정 발 장군의 막빈으로 공은
[부산은 우리나라의 관문이다. 부산이 없으면 동래가 없고 동래가 없으면 영남이 없다. 또한 영남이
없으면 우리나라가 안전할 수 없는것] 이라는 생각으로 혈전하다. 장군과 함께 옥쇄하고 말았다.
- 증직 :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