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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5호] #3. 사람 이야기 첫 번째: 유산으로 새로운 기억을 그리다.

부서명
전시팀
전화번호
051-607-8043
작성자
이아름
작성일
2025-03-18
조회수
167
내용

#3. 사람이야기  첫 번째: 유산으로 새로운 기억을 그리다.




다가오는 3월 25일, 부산근현대역사관 금고미술관에서 기획전시 <신선한 유산, 예술로 미래를 열다>가 개막합니다.

이 전시에 참여한 작가님 중 하야리아기지를 맡아 재해석한 김유경 작가님을 모시고

 하야리아기지를 비롯한 피란유산을 보는 관점과 함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보았습니다.


Q1.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회화작업을 하는 김유경 작가입니다. 주로 한지에 먹과 같은 안료로 작업합니다. 

이번에 하야리아기지 장소를 조사하고 작품을 새롭게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Q2. 금고미술관 기획전시 <신선한 유산, 예술로 미래를 열다>에 참여하게 된 소감이 어떠신가요?

  

한국의 대표적인 근현대유산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올라간 ‘피란수도 부산’의 역사를 조명하는 기획전시에 참여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감격스럽습니다.





Q3. 본 전시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아울러, 피란수도 부산유산 등재 목록 9개 중에 하야리아 기지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저는 고향이 부산이에요. 서울에서 살다가 부산으로 다시 오게 되었는데요. 예전부터 부산에 대한 기록들에 관심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피란수도나 역사적, 생태적 장소에 대한 기록들이요. 이전의 제 작업물들을 봐도 알 수 있듯, 예술과 아카이브를 매개로 과거, 현재, 미래의 파편적인 이야기들을 들여다보고 이를 엮는 연구에 관심이 많습니다.


   문화유산 목록에 있는 장소 대부분이 유형의 특정 건축물인 데에 비해 하야리아기지는 범시민운동으로 반환되기까지의 주둔하고, 사라지고, 이동하는 변천사가 고스란히 그 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과정 자체가 중요한 문화유산이라고 생각해서 하야리아기지를 택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그 땅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주변이 아파트와 높은 빌딩으로 둘러싸여 있는데요. 저도 아이를 데리고 자주 산책도 하는 친숙한 공간이라 좋아하기도 합니다.


Q4. 작품 제작을 위해 공간에 대한 조사를 많이 하셨을 것 같은데요. 특별히 어떤 조사를 하셨나요?


 우선 공간에 대한 답사를 진행했어요. 공원을 답사한 후에는 공원역사관에서 하야리아기지에 관한 사진이나 구술기록을 살펴보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3문(Gate3)의 본동마을에 대한 기록을 유심히 보았는데요. 주변에 사셨던 분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어요. 미군 부대에서 처음 먹었던 초코아이스크림, 근처에 있던 양장점, 슈퍼마켓, 담요 가게 등 그분들의 기억 중 대부분이 미군 부대 주변에 발달한 상권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3문은 미군들이 주로 외출이나 출퇴근 통로로 사용했고, 그래서 그 주변 거리가 미군을 상대로 한 장사로 활기를 띠었죠. 저는 하야리아기지와 그 일대가 아주 단절된 느낌일 거라 생각했어요. 우리 땅이지만 이방인의 땅이라 멀게만 느껴졌는데요. 하지만 제 생각과 다르게 그 당시 3문을 통해 소통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황령산 중턱으로 올라가면 이 공간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어요. 황령산에 있는 구상반려암은 마그마가 굳어져서 만든 암석으로 천연기념물이자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죠. 저는 이 구상반려암에 제 상상을 더해서 변형하여 그려냈습니다. 구상반려암이 흘러가는 시간을 상징하는 자연의 유물이라면, 황령산에서 바라본 하야리아기지는 도시의 유물처럼 보였어요. 이렇게 소재와 장소, 풍경들을 조사하여 저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해서 구성했습니다.






Q5. 작가님의 작가 노트를 읽어봤어요. 특히 ‘땅은 지구의 모든 존재와 서로 얽혀있는 감각으로서의 땅을 보여준다. 이는 곧 생의 흔적이 축적되는 회화로 소멸, 생성되는 풍경이자 기념비로 재현된다.’라는 구절이 인상 깊었는데요. 아시다시피 하야리아 기지는 여러 방식으로 공간이 변모되어왔어요. 하나의 작품에서 그 모든 변모를 나타내기는 어려웠을 것 같은데 작품 제작을 위해 어떤 점에 중점을 두었는지요?

  

 하야리아기지를 조사하면서, 특히 구술에 대한 자료를 보고 생각이 든 게,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하야리아기지에 대한 기억이 다 다르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원역사관에 있는 자료 그대로 하야리아 기지를 재현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저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해서, 감상자들이 공간을 모두 다르게 바라보게 하고, 자기만의 기억을 가지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하야리아기지 땅에 대한 장소기억 중에는 미군이 철수하고 공원으로 조성하기 이전,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수풀이 무성한 빈 땅의 모습을 간직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시기의 풍경은 시간이 멈춰진 공간처럼 생경했고, 생의 흔적이 가득했습니다. 이때 느꼈던 감정과 여러 장의 스케치는 3금고 전시장에 높이 2미터 길이 10미터 화폭 안에서 선형으로 이어지는 대형 회화로 완성되었습니다. 바로, <땅과 주름진 밤>이라는 제목의 작품인데요. 땅은 공간을, 주름진 밤은 시간을 뜻합니다. 식민과 냉전의 영향으로 계속해서 변해가고 있는 공간의 모습은 땅을 통해 역동적인 기운으로 나타냈습니다. 또, 시간에는 주름이 져 있다고 은유적으로 접근하여, 시간이 교차할 때 과거의 것이 현재로 소환되는 모습을 감각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렇듯 땅의 긴장감과 밤의 고요한 상황이 만나는 하야리아기지의 모습을 감상자가 상상할 수 있게 나타냈습니다. 작품 속 풍경은 특정 풍경의 찰나를 포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요한 밤의 시간 속 원초적 대지와 돌, 나무로부터의 거대한 순환을 나타냅니다. 개발, 보전, 쇠퇴, 소멸, 생성을 반복하는 공간의 과정이 자연의 순환과 닮아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Q6. 본 작품을 제작하기 전에 영감을 받았거나 눈여겨봤던 작품이 있으신가요? 아울러, 작가님의 작품에 영향을 많이 주는 다른 작가나 특별한 매체가 있는지요?


 하야리아기지를 맡게 됐을 때, 오민욱 다큐멘터리 감독님의 <범전>과 <라스트나이트> 프리뷰 영상을 제공해주셔서 참고했습니다. 박물관에 기록되어있지 않은 하야리아기지 주변부 범전동 일대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요. 황폐해진 장소와 주변부 사람들의 이야기 등을 통해 그 당시를 현장감 있게 알 수 있었습니다. 또, 조사 중에 하야리아기지에서 12세 북한군 포로와 미군이 찍은 사진을 보게 되었는데요. 그 사진을 보고도 영감을 크게 얻었습니다. 냉전의 산물인 부대가 있는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적군인 북한군 포로와 미군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에 묘하게 휴머니즘이 느껴지기도 했어요. 문헌만 보았을 때와는 달리 다큐멘터리와 사진을 보니 하야리아기지와 일대는 여러 가지가 뒤섞인 공간이라고 느껴졌고, 그 뒤섞임에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저는 회화가 베이스인 작가지만, 다양한 매체를 시도해보고 싶은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저에게 영향을 많이 주는 작가도 회화작가보다는 다큐멘터리 작가들이 많아요. 한 사람만 꼽자면, 홀로코스트로 작업을 했던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입니다. 삶과 죽음, 존재의 덧없음, 기억과 망각을 주제로 작업을 해왔고, 부재를 통해 존재를 증명하는 작가입니다. 볼탕스키는 존재의 흔적을 현재의 공간에 대규모의 스케일로 장치하는 것으로 유명한데요. 시간의 흔적을 기록하는 작가로 저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Q7. 작가님의 지난 작품을 살펴왔을 때 한지와 먹으로 제한되는 ‘동양화’의 전통 기법을 고수하면서도, 특정한 장소의 풍경과 그 장소에 머물렀던 경험적 시간을 결합한 새로운 회화, 설치, 드로잉 작업들이 많아요. 이러한 실험적 시도를 계속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동양화의 전통 기법을 고수하기도 하지만, 요즘은 더 매체를 다양하게 쓰려고 해요. 동양철학에도 관심이 많고요. 수묵 작업에서는 모노톤의 절제된 색감 속에서 더욱 강조되는 것이 있는데요. 예를 들면, 색이 없음으로써 실재하는 장소와 대상은 감추고, 기운으로서 과거의 집단적 에너지를 드러내는 식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감상자의 상상을 좀 더 자극하기도 하죠. 더 나아가 동양화의 화면에 다양한 매체를 가져와 스케일의 변화를 주기도 합니다. 감상자에게 새로운 미적 환기를 유발하는 것에 계속 관심을 두고 있어요. 체험적이고 능동적인 감상법을 제안하고자 회화, 설치, 영상 등 매체를 결합해 실험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작가가 작품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방식보다는 감상자가 새롭게 체험하고 능동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방식을 원해요. 3금고에도 여러 점의 회화를 설치하기보다는 파노라마 형식의 작품을 대각선으로 과감하게 설치했어요. 문을 통해서 감상자가 들어 왔을 때, 이 풍경을 직면하는 방식도 다양할 것입니다. 걸어 다니면서 볼 수도 있고 부분을 볼 수도 있죠. 소요하면서 볼 수 있게끔 작품을 설치했습니다.


Q8. 작가님의 표현법을 보면, 일상에서 채집한 주변 풍경들을 재배열하고 흑백 모노톤의 안료를 끊임없이 중첩해 가는 방식으로 감정을 전달해요. 겹겹이 쌓아 올리고 겹쳐진 형상들의 표현에서 모호함과 미묘한 차이를 만들어내죠. 뿌옇게 외곽을 흐리거나 형상이 사라지는 듯 표현함으로써 사라질 위기에 처한 절박한 존재들이 드러나는 듯해 보여요. 이번 작품에서는 표현적인 측면에서 어떤 점을 더 강조하셨나요?


 이전의 작품이 한지에 스며들어서 사라지는 방식으로 존재를 표현했다면. 이번엔 오히려 드러내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하야리아기지와 그 일대의 땅이 겪었던 우여곡절의 강렬함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기존에는 한지라는 매체를 썼다면 이번에는 촉각적으로 더 생경한 풍경을 만들기 위해 천을 사용하였습니다. 이 천은 멀리서 보면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보풀이 일어난 천이죠. 그래서 더 흑백의 대비가 강렬해 보이기도 합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사라지는 것이 아닌 땅을 드러내는 완성된 회화를 통해 뒤섞인 시간,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그리고자 했습니다.






Q9. 김유경 작가님이 본 피란수도 부산유산, 특히 하야리아 기지를 한 문장으로 정의한다면요?


  한 문장보다는 더 길게 말해야 할 것 같아요. 제가 느끼기에 개발과 유산의 보존은 경계에 있어 보여요. 사라지는 것과 남아있는 흔적 사이에서 우리가 이 경계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생각해보게 하는 공간이 바로 하야리아기지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있는 하야리아 기지를 바라보며 흔적과 경계를 감상자 여러분께 되물어보고 싶습니다.


Q10. 금고미술관 기획전 <신선한 유산, 예술로 미래를 열다>가 개막을 앞두고 있습니다. 전시를 기대하고 있는 관람객에게 한마디 전한다면요?

  

이번 전시를 저 또한 기대하고 있습니다. ‘예술로 미래를 열다’라는 제목처럼, 과거의 역사를 현시대에 젊은 미술 작가가 표현한 작품은 도래할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는데요. 피란유산을 박물관에서만 보는 딱딱하고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미술 작가가 현재의 시각에서 자유롭게 표현했으니까, 보시는 분들도 자유롭고 신선하게 봐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이번 전시가 피란유산에 대한 새로운 기억이 계속 만들어지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공간의 가진 역사를 현대미술로 새롭게 이야기하는 김유경 작가님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며 인터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