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근대역사관
#2. 공간 이야기 첫 번째: 그때 그 시절 음악다방 ‘무아(無我)’
그때 그 시절 ‘무아(無我)’에는 한국 대중가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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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오광수 국제신문 선임기자
부산 중구 광복로의 용두산공원 오르는 길에 자리 잡은 허름한 상가 건물. 그곳에 ‘무아(無我) 음악감상실’(이하 ‘무아’)이 있었습니다. 광복로에서 용두산공원으로 향하는, 지금의 에스컬레이터 근처입니다. 그렇다면 ‘무아’는 몇 층이었을까요? 누구는 1층 ‘수’다방과 3층 당구장 사이 2층에 있었다고 하고, 다른 누구는 4층이라고 합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무아’가1970∼1980년대 부산 대중문화에서 큰 페이지를 차지한 ‘음악다방’의 대명사였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건물 입구부터 음악 소리가 들려옵니다. ‘빽판’인가? ‘치직’ 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네요. 입장료를 낸 뒤 여닫이문을 열고 들어섭니다. 정면에 뮤직박스(DJ박스)가 보여요. 뮤직박스 안에는 LP판이 가득 꼽혔고, 신청곡으로 틀어줄 음반 몇 개는 뮤직박스 창틀 맨 아래에 줄지어 서 있습니다. 조명은 어둡고요. 뮤직박스만 환하게 밝습니다. 그 앞으로 280석의 극장식 의자가 있네요. 아니, 강의실 의자일까요? 의자 팔걸이 양쪽으로 널빤지를 가로질러 놓았습니다. 테이블로 쓰라는 의미죠. 극장처럼, 강의실처럼 실내에서는 잡담과 흡연은 안 됩니다. 입장료를 내면 받는 입장권에는 신청곡과 사연을 적을 수 있었습니다. 입장권 한 귀퉁이를 잘라 직원에게 전하면 여름에는 분말 오렌지주스를, 겨울에는 생강차를 내줬죠. 나중에는 사시사철 요구르트로 바뀌었습니다. 여기까지가 ‘무아’를 기억하는, ‘무아’에 있었던 이들을 통해 본 ‘그때 그 시절’ ‘무아’의 풍경 일부입니다.
‘무아’의 DJ였던 부산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의 ‘별밤지기’ 최인락 씨의 옛 사진 한 장. ‘무아’ 입구에 있던 프로그램 안내판 앞에서 찍은 것입니다. 오른쪽에 DJ 이름이 보입니다. 이상민 최길락(1983년 이전 최인락 씨의 이름) 설리진 박태수 박현미…. 1980년 스무 살에 ‘무아’에 발을 디딘 최인락 씨가 3년간 형의 이름인 ‘최길락’으로 활동했으니, 사진은 1980년에서 1983년 사이의 것입니다. 사진에도 보이듯 ‘무아’는 팝음악과 고전음악(클래식)을 모두 들려줬지만, 팝음악을 주로 틀었습니다. 주 고객이 젊은 층이었던 까닭인데요. 한국 대중음악은 ‘무아’에서는 없었습니다. 그 시절 한국 대중음악은 뒷전이었어요. 적어도 젊은 층에게는…. 필자도 그랬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 딥퍼플, 레드 제플린, 핑크 플로이드, 에릭 크랩튼…. 얼마나 많은 팝음악과 아티스트를 아느냐, 남들이 잘 모르는 희귀 음반을 얼마나 많이 아느냐, 이런 것이 자랑이었던 시절입니다. 한국의 대중음악이 팝음악의 아성을 넘어선 건 30년 정도밖에 안 됩니다. 1990년대 이후부터인데요. 현재 FM라디오에서 대세는 K팝이죠. 격세지감입니다.
레코드와 ‘빵빵한’ 음향시설을 갖추는 것이 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부산 중구의 광복동 동광동 신창동 창선동 남포동 부평동 일대는 한국전쟁기 ‘밀다원 시대’를 이었습니다. 음악다방, 음악감상실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났죠. 김형찬 씨에 의하면 1953년 무렵 남포동에서 클래식 음악다방 ‘비원’이 문을 열었습니다. ‘태백’, ‘천연장’, ‘망향’, ‘스타’, ‘금강’, ‘클래식’도 클래식 음악다방들이었어요. 1957년 광복동 미화당백화점 4층에 문을 연 ‘미화당 음악실’은 매주 KBS 노래자랑이 열렸던 터라 신인가수들의 등용문 역할을 했습니다. 1957년 고갈비 골목에 들어선 ‘아폴로’는 피아니스트 백건우 독주회(1959)를 열기도 했죠.
1970∼1980년대 부산의 청년문화에서 ‘무아’와 ‘별들의 고향’(남포동)이 양대 산맥을 이뤘습니다. ‘무아’가 팝음악 중심의 음악감상실이라면, ‘별들의 고향’(이하 ‘별고’)은 포크 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며 술을 즐기는 펍 레스토랑이었어요. 1978년부터 1981년까지 ‘별고’에서 DJ 겸 MC를 지낸 김영수 씨는 ‘별고’가 “부산 유일의, 청춘의 해방구”였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별고’에 있던 기간 송창식 이장희 김세환 양희은 이수만 윤형주 어니언스 홍민 하남석 김정호 노고지리 등이 매일 공연했다고 해요. “‘별고’를 거치지 않으면 통기타 가수가 아니다.”라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별고’는 1980년대 중후반 무렵 나이트클럽으로, ‘별고룸 노래 소주방’으로 잇달아 바뀌어 갔습니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