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근대역사관
#Ⅰ. 다시쓰는 역사 두 번째: 부산 대중음악의 지역성
바다를 닮은 에너지로 부산만의 독창성을 만들어내다.
소요시간: 2분
글. 김형찬 대중음악 저술가
우스갯소리로 요즘처럼 수도권 중심이 되어버린 상태를 경기도라는 달걀흰자에 서울이라는 노른자가 떠 있는 모습이라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수도권에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이 모여서 살 정도로 수도권 중심의 중앙집중화는 심각한 상태인데요. 그렇다면 이제 지역성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에도 여전히 인구의 절반은 지역에 살고 있고, 지역에 사는 지역민이 존재하는 한 지역민의 삶을 반영한 문화는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단지 이런 지역민의 문화가 중앙의 문화에 비해 매체에 잘 소개되지 않아서 마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부산의 지역문화는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그 특징은 어떤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일까요? 북쪽이 삼팔선으로 막힌 상태는 한반도를 육지에 갇힌 섬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렇기에 새로운 문화는 우선 한반도 제1의 항구인 부산을 통해 들어올 수밖에 없었어요. 1926년 부산과 일본을 왕래하는 관부연락선에서 소프라노 윤심덕과 극작가 김우진의 동반자살 이후에 발매된 윤심덕의 <사의 찬미>는 폭발적인 판매량을 보였습니다. 그 영향으로 SP음반 재생기인 축음기가 전국 방방곡곡으로 전파되었고, 이는 곧 한국대중음악의 탄생을 알리는 서막이었죠.
해방 이후 1946년 가을, 서울과 거의 동시에(서울은 1946년 여름에 고려 레코드) 대평동에 코로나 레코드사가 설립되면서 한국의 진정한 음반산업은 시작되었어요. 일본에서 음반 제작기술을 배워서 돌아왔던 야인초는 국제시장으로 흘러들어온 미군부대의 부속품을 사들여서 공장 한구석에 음반 제작 시설을 갖추었습니다. 연지동에 있었던 금성사는 1959년에 한국 최초로 A-501이라는 라디오를 생산하면서 라디오 시대를 알렸습니다. 1978년에 일본에서 가라오케가 등장한 지 1년만인 1979년에 부산에 가라오케가 등장했고, 1990년대 초 일본에 등장한 노래연습장은 곧 부산으로 유입되어 노래방으로 재탄생했어요. 이처럼 한국 대중음악을 이끌었던 중요한 인프라는 대부분이 부산을 통해 수입되었답니다. 이렇게 항구를 통해 새로운 외래문화를 앞서서 맛볼 수 있었던 부산은 나름대로 독창성 있는 문화를 만들어내며,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전국적 음악 트렌드에 대항하는 새로운 음악적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1977년 시작된 MBC 대학가요제가 1980년대에 들어서 초창기의 꾸밈없고 순수했던 모습에서 멀어지며 대중가요의 모습을 닮아가려 했을 때, 1986년부터 부산의 높은음자리, 여운, 어우러기, 도시의 그림자 등이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에 입상하면서 내놓은 새로운 스타일은 팝화된 통기타 음악이었습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서울의 홍대 앞의 클럽을 중심으로 인디 록밴드 붐이 일어났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부산에서 인디밴드를 시작했던 앤, 레이니선, 에브리싱글데이. 헤디마마, 피아 등의 밴드는 1980년대와는 달리 아예 서울로 근거지를 옮겨 갈매기 공화국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함께 공연하며 부산 출신 밴드의 남다른 개성을 드러냈습니다. 보다 자유로우면서도 거친 느낌이 살아있는 음악을 선보였던 것이죠.
이러한 느낌의 음악은 부산이 밖으로 넓게 열린 바다를 끼고 길쭉하게 이어진 지리적 조건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어요. 부산을 닮은 거친 바닷가 사람의 캐릭터를 지닌 가수들은 에두르지 않는 직설적으로 표현으로 바다를 향해 젊음의 에너지를 포효하는 모습이었습니다. 1960년대의 김상국과 문주란, 1970년대의 나훈아, 최백호, 1980년대의 현철과 설운도, 1990년대의 레이니선, 현재 보수동의 싱어송라이터 김일두 등 많은 가수가 배출되었죠.
중앙집중화의 정점을 향해 달리고 있는 현재에 지역성을 말하는 것이 무척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나 정점에 도달했다는 것은 곧 한계를 드러내고 다시 지역성이 주목받는 시대가 눈앞에 도래했다고 볼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부산이 갖는 음악적 저력이 다시 빛을 발하게 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