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근대역사관
2. 공간 이야기 첫 번째: 음악가들의 사랑방, 문화장(文化莊)
해방기 부산, 어느 다방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지금부터 엿들어볼까요?
기사읽는 소요시간: 2분
글. 남영희 부산문화회관 사업본부장
가: 아— 해방 후에 가장 딱한 중독 세 가지를 가르쳐줄까. 그 대신 찻값은 자네가 내게. 대신 나는 음악가의 3대 유행병을 가르쳐주지.
나: 1. 관리의 술 중독, 2. 학생의 담배 중독, 3. 여자의 아편 중독. 어떤가?
가: 1. 내가 조선 제일 병, 2. 내 아니면 되나 병, 3. 어디 뉘가 있나 병. 어떤가?
나: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으니 찻값은 내가 내지요. 그런데 우리들이 이렇게 매일 다방에 와서 앉아 있는 다방 중독을 합산해야 할 것 같소.
알코올, 담배, 아편 중독이 만연했다는 사실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지만, ‘병’이라 부를 만큼이나 유별난 음악가의 자존심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방 중독”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요. 유명 프랜차이즈 카페나 독특한 콘셉트로 핫플이 된 카페에는 자리를 잡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해방기 부산에는 에덴, 문화장, 캬라방, 진주, 춘추, 늘봄, 백미(白美), 무지개, 무궁화, 랑랑 등 수많은 다방이 활발히 영업 중이었습니다. ‘명곡’ 캬라방, ‘거리의 음악실’ 춘추와 같이 음악을 콘셉트로 삼은 곳도 많았죠. 특히 ‘음악 전당’을 표방한 광복동 에덴은 클래식 음악 다방으로 유명했어요. 식민지 시대 동아일보 부산지국장을 지냈던 강대홍이 인수한 제일다방이 전신으로, 조선사람이 경영한 첫 다방이라 전해집니다. 1935년 소설가 김말봉이 동아일보에 「밀림」을 연재할 때 부산고등여학교 4학년생 한무숙에게 삽화를 맡겼는데, 이들이 원고와 삽화를 주고받은 장소이기도 하답니다.
해방 이후 클래식 음악을 전면에 내세우며 새롭게 등장한 음악다방이 바로 문화장이었습니다. 일본에서 유학한 바이올리니스트 배도순이 보수동에 문을 열었죠. 문화장에서는 특색 있는 음악감상 프로그램을 선보였는데요. 가령, 1948년 6월 14일부터 일주일간 진행한 ‘명곡 레코드 감상회’는 베토벤 음악이 주제였어요. 월요일 <교향곡 제5번 “운명”>, 화요일 <피아노 협주곡 제5번 “황제”>, 수요일 <교향곡 제6번 “전원”>, 목요일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금요일 <피아노 소나타>를 감상하도록 꾸렸으며, 마지막 날인 토요일에는 <교향곡 제9번 “합창”> 감상과 함께 작은 음악회를 열기도 했죠. 오늘날 카페를 겸한 작은 문화공간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처럼 세련된 기획이지 않나요?
한국전쟁 시기 문화장은 피란음악인들과 부산음악인들의 밀도 높은 교류가 이루어졌던, 전시음악사회의 주요한 공간이었습니다. 특히 해군 정훈 음악대(훗날 서울시향)가 체류하는 부평동 숙소 아사히(朝日)여관과 가까워 음악인들이 드나들기에 안성맞춤이었죠. 배도순은 아침저녁으로 이들과 서로 만났으며, 서울로 돌아갈 때까지 고락을 함께했다고 회고했습니다. 전쟁기의 애환과 낭만을 함께했던 경험은 전후 부산음악인들이 서울에 진출하는 계기로 작용했어요. 윤이상, 배도순, 김점덕이 대표적 인물입니다. 문화장은 배도순이 1958년 서울시향으로 가면서 문을 닫게 되는데요.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커피와 음악이 함께 출렁였던 거리의 음악실이자 음악가들의 커뮤니티 공간은 세월의 풍화를 견뎌내지 못하고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문화장의 위치는 부산근현대역사관 인근이었습니다. 역사관 1층 까사부사노에서 부사노 그린티가 우러나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숱한 음악가들이 문화장으로 향하는 소란스러운 발걸음이 들리는 것만 같네요. 찻주전자와 함께 내온 작은 모래시계만큼이나 짧은 것이 우리의 삶이죠. 그 속에서 어울림이란 더없이 소중한 가치입니다. 어울리면서 위로를 주고받고, 삶의 이정표를 찾기도 하니까요. 내가 제일이라거나 오직 나뿐이라는 오만한 마음도 순하게 가라앉고 겸손해지죠. 그런 점에서 다방은 음악의 전당이라기보다 ‘사랑방’입니다. 오늘날에도 “다방 중독”이 여전한 이유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