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근대역사관
1. 다시 쓰는 역사 두 번째: 요즘 어느 다방 나가시오?
한국전쟁기 문화예술의 요람, 광복동 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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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미술평론가, 더마루아트컴퍼니 대표 박진희
1950년대 초 한국전쟁 당시, 피란 수도 부산에서는 “요새 어느 다방 나가시오?”라는 말로 서로의 안부와 거처를 물었다고 합니다. 당시 부산 광복동 일대는 ‘다방’이 골목마다 보일 정도로 많아졌는데, ‘다방’은 당시 문화예술인들에게도 특별한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피란민뿐만 아니라 문화예술가들도 부산으로 모여들었는데요. 때문에, 부산에서는 피란지라는 특수상황 속에서도 역설적으로 문화 활동이 활발히 피어났습니다. 광복동 바로 옆의 신창동과 창선동 일대의 국제시장은 전국에서 유일한 대규모 수입품 도매시장(국제시장)으로, 6·25전쟁 전후에는 전국의 상권을 좌지우지해왔던 곳이에요. 이곳은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최대의 소비문화와 문화예술, 유흥문화가 공존하는 지역이었죠.
광복동 일대의 ‘다방’은 전쟁 시기 문화예술인들의 집결지이자 문화 활동의 구심점이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작품 발표 의지를 표출한 곳이 바로 다방이었죠. 다방은 미술가들에게는 전시장소로, 문인들에게는 출판기념회나 시 낭송 장소로, 음악·연극·영화를 비롯하여 다양한 문화예술가들에게는 교류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또한 다방은 오갈 곳 없는 화가나 문인, 음악가, 영화인들의 사무실 겸 작업장, 연락처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화가 이중섭은 다방을 전전하며 담뱃갑 속 은박지에 그림을 그려 ‘은지화’를 탄생시켰다고 하죠.
한국전쟁 시기 부산다방에 대한 예술가들의 회고들을 한번 살펴볼까요?
“피란 온 부산에서는 사람들도 무척이나 복작였지만 모임도 참으로 많았던 것 같다. 좁은 바닥에 모두들 모였고 몸담을 적당한 자리도 없으니 해만 뜨면 다방에 모여든 까닭인 것 같다. 다방에 모여 앉아 내 생각 네 생각 털어놓다 보니 가까운 사람들, 뜻 맞는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이게 되었고 그래서 쉽게 여러 모임이 만들어졌다.” - 백영수(화가)
“광복동의 문총 사무실 2층에 있는 이 다방(밀다원)은 당시 갈 곳 없는 문인들의 안식처였고 찾기 힘든 동료들의 연락처였으며 일할 곳 없는 작가들의 사무실이었으며 심심치 않게 시화전도 열리는 전시장이기도 했다. 이들은 여기서 원고를 썼고 약간의 고료가 생기면 차나 가락국수를 시켜 먹고 혹은 선창가의 대폿집에 들어“피란살이의 시름과 허탈, 자학, 을분”을 동동주에 띄우며‘예술대회(유행가 부르기)’를 열기도 했다.“ -김병익(평론가)
“1952년 8월 18일, 나는 피난 내려온 부산에서 정음사 최영해 사장의 호의로 제3시집 『패각의 침실』을 출판했다. 그리고 부산 광복동 네거리 <녹원> 다방에서 출판기념회를 했다. 비가 내리는 늦은 여름밤이었다. 피난지에서의 모임이라 그랬는지 참으로 많은 시인, 소설가, 예술가, 학교 동료들이 가득히 참석을 해 주었다. 김소운·오상순·안수길·이하윤·이헌구·한노단·손소희·김말봉·이한직·운용하·이진섭·이인범·이해랑·김윤성·이명온·김환기……” -조병화(시인)
당시 예술가들에게는 고달픈 피난살이를 보듬어 준 곳. 서로의 만남이 예술의 만남이 된 곳, 예술에 대한 갈망과 의욕이 실현되게 해준 곳이 바로 ‘다방’이었습니다. 이렇듯 한국전쟁 시기 ‘광복동 다방’은 한국 예술사에서 중요한 문화 활동의 현장이자 부흥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