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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유산 이야기


영화도시 부산의 장소적 기원(조선키네마주식회사)

부서명
문화유산과
전화번호
051-888-5094
작성자
김지은
작성일
2024-08-23
조회수
56
내용

한국 영화사의 시작 지점, 복병산을 찾다


부산광역시 중구청이 들어선 복병산은 골목마다 역사가 깃들어 있다. 100미터도 되지 않는 이 야트막한 산 주변으로, 조선시대에는 왜관이 있었으며,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모여 생활했던 40계단이 있으며, 부산의 성장을 지탱해 온 동광동 인쇄골목이 들어서 있다.
일제강점기라는 민족의 수난 시기 역시 복병산 여기저기에 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곳은 당시 부산부 최고의 번화가였던 장수통과 가까웠기 때문에 다양한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이 근방에는 부산우편국이나 헌병분대, 영사관, 그 외에도 다양한 시설이 있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이곳에 들어서 있던 시설이나 회사를 조사해 보면, 특이한 이름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조선키네마주식회사.
비록 짧은 기간동안 존재했을 뿐이지만, 한국 영화사를 이야기할 때 그 시작 지점에 놓인 이름이다. 복병산 자락에 한국 영화의 역사가 시작된 순간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있었던 장소로 가는 오르막길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있었던 장소로 가는 오르막길> ⓒ무경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제작사,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조선키네마주식회사는 1924년 설립되었다. 그전까지 조선에서 제작되는 영화는 연극 단체가 연극의 일부로 제작하거나 조선총독부가 선전용으로 제작한 영화뿐이었다. 극장 운영자들이 스스로 자본을 들여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지만 전문적인 제작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단발성 시도에 그칠 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영화 <춘향전>(1923)과 <장화홍련전>(1924)이 흥행하면서 새로운 흐름이 형성된다. 일본인 왕필열[본명 高佐貫長]은 조선 영화의 시장성에 주목한 것이다. 그는 일본의 자본과 영화 기술을 조선의 배우와 결합하여 조선과 일본을 시장으로 삼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그렇게 조선인 연극단체 ‘무대예술연구회’ 단원들이 섭외되고 일본인들의 자본이 모여 1924년 7월,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설립된다.
영화사에서 영화제작사 설립은 큰 의미를 지닌다. 단발적이거나 아마추어적인 제작을 넘어서서, 산업으로서 전문성을 갖추어 만들어진 증거이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산업의 시작이 부산이라는 증거가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인 셈이다.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짧은 흥망성쇠


조선키네마주식회사는 1924년 7월에 설립되어 1925년 폐업한다. 한일 합작의 형태로 만들어진 이 회사는 조선인 관객을 주요 대상으로 삼아 조선의 인물, 배경, 사건을 다루는 4편의 영화를 제작하였다.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제작한 첫 번째 영화는 <해의 비곡>(1924)이다. 조선인으로 이루어진 ‘무대예술연구회’의 동인들이 출연했지만 각본과 감독, 주요 기술진은 일본인이었다. 제주도를 배경으로 하여, 사랑에 빠졌으나 뒤늦게 서로 남매 사이임을 알게 되어 세상을 등지는 인물들의 비극을 다룬 이 영화는 조선과 일본에서 흥행에 성공하여 수익이 3천 원에 이르렀고, 일본에 차기작 수출을 보장받는 성과를 이루었다.
조선과 조선인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흥행할 수 있다는 것이 검증되자, 회사는 본격적인 조선 소재 영화를 만들고자 당시 연극계에서 신극 운동을 주도하던 윤백남을 초청한다. 역사적 소재에 정통했던 윤백남은 안평대군 때를 배경으로 한 인기있는 고전 소설 <운영전>을 영화로 옮기기로 한다.
하지만 영화 <운영전>(1925)의 제작은 회사가 단명하는 원인이 되고 만다. 윤백남이 조선키네마의 실권을 장악하면서 조선인 직원과 일본인 고용주 간의 갈등이 불거졌고,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만든 <운영전>이 흥행에 실패하고 만 것이다.
윤백남은 조선인 배우와 제작진을 데리고 경성으로 가 버렸고 회사는 이후 <암광>, <촌의 영웅> 등 두 편의 작품을 더 발표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925년에 폐업한다.
한편,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몸담았던 인물 중 윤백남, 이경손, 김태진, 안종화, 주인규 등은 이후 한국 영화사와 문화사, 심지어 독립운동사 여기저기에 이름을 남긴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는 춘사 나운규(1902~1937)이다. <운영전>에서 단역인 가마꾼 역할로 배우 인생을 시작한 그는 영화의 흥행 참패 후 윤백남을 따라 경성으로 돌아갔으며, 윤백남이 제작한 영화 <심청전>(1925)의 심봉사 역으로 출연하여 유명세를 얻고, 이듬해 직접 감독과 주연 배우를 맡은 영화 <아리랑>(1926)을 제작한다. 조선키네마주식회사는 나운규와 <아리랑>의 뿌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짧은 시기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조선키네마주식회사를 거친 이들의 이름은 굵고 선명하다. 조선키네마주식회사라는 낯선 이름의 회사가 설립되고 사라지기까지의 과정을 더듬어 보면, 이 회사의 이름을 한국 영화 역사의 시초에 두는 게 당연해 보인다.


미약하게 남은 흔적을 더듬다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흔적을 찾으려 복병산을 찾은 건 무덥고 흐린 날이었다. 더위와 습기가 온 세상을 가득 채운 날에 좁고 굽은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가기가 힘들었다. 동광동 인쇄골목으로 조금 깊이 들어가면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위치는 당시 주소로 부산부 본정5정목 19번지였다. 이곳에는 2층 양옥 건물이 서 있었는데, 공산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러시아 제국 시절 영사관으로 쓰이던 건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조선키네마주식회사 터 주위 담장을 장식한 벽화, 영화를 소재로 한 아기자기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1

조선키네마주식회사 터 주위 담장을 장식한 벽화, 영화를 소재로 한 아기자기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2

<조선키네마주식회사 터 주위 담장을 장식한 벽화, 영화를 소재로 한 아기자기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무경


도로의 벽화에 영화를 소재로 한 아기자기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것이 한때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표식이다. 그 담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담 한편에 붙은 스테인리스 명판을 볼 수 있다.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역사를 설명하는 두 장의 명판은 이곳이 한국 영화사의 시작이었음을 건조하게 알리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흔적의 끝이다. 담벼락 너머에는 작은 공터만 있을 뿐이다. 지금은 차를 주차하는 용도로 쓰이는 작은 땅.


조선키네마주식회사를 설명하는 명판1

조선키네마주식회사를 설명하는 명판2

<조선키네마주식회사를 설명하는 명판> ⓒ무경


조선키네마주식회사 터, 현재 이 자리는 공터이다

<조선키네마주식회사 터, 현재 이 자리는 공터이다.> ⓒ무경


근처를 하염없이 돌아다녀 보았다. 회사가 사라진 이후에는 일제강점기 일본군 장교들이 사용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도 군인이 건물을 이용했다고 한다. 1953년 부산역 화재 당시 같이 소실된 이후, 건물이 있던 자리에는 집들이 들어서서 이제는 작은 땅만 남았다. 근처 오래된 집들의 담벼락에 남은 커다란 창문의 흔적이나 예전에 세운 게 분명한 축대를 살피며, 이것이 한때 조선키네마주식회사 건물의 일부를 이루던 것이 아닐까 상상만 해볼 뿐이다.
조선키네마주식회사를 이야기하려면 결국 복병산 이야기를 해야 한다. 해발 100미터도 되지 않는 작은 산을 따라 부산의 역사가 구석구석 흔적을 남기고 있다. 부산지방기상청처럼 건물로 남은 흔적, 조선키네마주식회사처럼 터만 남은 흔적, 심지어 동광동 인쇄골목처럼 길 그 자체가 흔적이기도 하며, 40계단과 같은 가파르고 낡은 계단이 흔적이기도 하다. 이름이 뚜렷이 남지 않은 평범해 보이는 집과 골목, 계단 또한 저마다 역사를 새기고 있다.
조선키네마주식회사를 찾아가는 짧은 여정은, 결국 한국 영화사를 더듬고 부산의 근현대사를 되짚는 여정이기도 했다. 한국 영화사의 뿌리는 부산이라는 토양에 이렇게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복병산 주위의 골목길, 계단과 좁은 오르막이 뒤섞여 있다.

<복병산 주위의 골목길, 계단과 좁은 오르막이 뒤섞여 있다.> ⓒ무경



영화의 도시 부산


부산은 한국 영화의 태동을 만들어 냈고, 한국 영화의 성장과 흐름을 이끌어온 전통을 가진 도시이다. 현대 부산 문화의 중요한 축이 영화라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부산에서는 영화와 관련 있는 다양한 행사와 장소를 쉽게 접할 수 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1996년부터 시작하여 지금은 세계적인 영화제로 자리매김했다. 영화의전당, 영화의 거리 등의 장소는 부산을 찾는 이들에게 영화를 만드는 모든 과정을 훌륭한 즐길거리로 제공한다. 영화인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장인 한국영화아카데미, 부산아시아영화학교 등의 시설 또한 부산에 들어서 있다. 복병산 건너 용두산 아래 서 있는 부산영화체험박물관은 한국과 부산 영화의 역사를 기록했고 영화 제작에 관한 다양한 체험을 제공하는 장소이다. 또한 부산은 많은 영화가 촬영된 지역이기도 하다. 복병산 근처에서도 영화를 촬영한 장소라는 안내판이 붙은 걸 더러 볼 수 있다. 부산의 골목과 도로, 건물과 식당 등은 영화인에게 매력적인 촬영 장소로 사랑받았다.
영화는 짧은 상영시간 속에 극적인 사건과 많은 이들의 삶을 압축해서 담는다. 한때 조선키네마주식회사를 품었던 복병산 자락은 마치 영화를 닮은 공간이다. 부산의 역사를 압축해서 담은 매력적인 장소이기 때문에.


골목길 계단의 주인처럼 자리 잡은 고양이, 영화의 한 장면 같다.

<골목길 계단의 주인처럼 자리 잡은 고양이, 영화의 한 장면 같다.> ⓒ무경


[ 무경 작가 기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