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앙동과 남포동 일대가 익숙하다. 고등학교를 다녔을 무렵 이 동네를 걷기도 했고, 그 뒤로도 여러 이유로 찾곤 했다. 이곳을 걸으면서 쌓았던 여러 기억은, 일제강점기 당시 ‘장수통’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이 지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쓰면서 녹아 들어갔다. 당연히 동아대학교 부민 캠퍼스와 중앙동 사이를 잇는, 부평깡통시장과 보수동 책방골목을 낀 길인 대청로 또한 자주 걸었다. 하지만 인쇄골목을 크게 주목한 적은 없었다. 이 골목 주변으로 인쇄소가 참 많구나. 그런 단순한 감상만 있을 뿐이었다. 동광동 인쇄골목은 40계단을 중심으로 좌·우측 이면도로를 따라 코모도 에스테이트 뒤편까지 300여 미터에 걸친 곳을 가리킨다. 인쇄, 출판, 기획, 재단, 지업사 등 인쇄 관련 일을 하는 가게가 다양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인쇄골목을 답사하러 온 날은 맑고 더웠다. 대청로를 걷는 사람은 있었지만 골목으로 들어서는 이는 거의 없었다.
<동광동 인쇄골목 가는 길> ⓒ무경
골목 입구에는 동광동 인쇄골목을 알리는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조형물 없이도 골목을 들어서기 전 길가에서부터 여러 인쇄업체를 볼 수 있다. 간판이나 유리창에 적힌 ‘카렌다’라는 옛날 표기가 정겹게 느껴진다. 이곳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되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화창한 하늘과 골목의 회색빛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듯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나는 좁은 길을 천천히 걸었다. 이곳에서 살거나 일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이가 무심한 걸음으로 옆을 지나친다. 평일이라서인지 관광객은 없었다. 잉크의 검은색과 종이의 하얀색이 지배하는 공간, 동광동 인쇄골목을 답사하는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동광동 인쇄골목> ⓒ무경
동광동 인쇄골목의 위치는 부산을 여행하는 이들이 자주 들러 사진을 찍는 장소인 40계단의 위쪽에 있다. 피란민들의 눈물과 애환이 담긴 장소인 40계단 인근이라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곳은 피란 이후 골목의 정체성을 만들어갔다. 동광동 인쇄골목의 시작이 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한국전쟁 당시 피란 온 서울의 여러 인쇄업체가 당시 임시정부청사로 쓰이던 경상남도청 인근에 자리잡으며 인쇄 수요가 늘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동광동에 인쇄소들이 모인 시초는 1960년대 초로 보인다. 당시 신우정판과 동양정판, 자문정판이라는 인쇄소가 자리 잡았는데, 이들을 시작으로 이런저런 인쇄소들이 하나둘씩 자리 잡기 시작했다. 지금도 신우정판은 그 이름을 그대로 걸고 영업중이다. 이곳이 본격적으로 인쇄골목으로 유명세를 얻은 건 1970년대 초부터이다. 이곳에 인쇄 재료상인 ‘문화사’가 들어선 뒤 그 주변으로 인쇄소가 하나둘 자리 잡았다는 증언이 남아 있다. 지리적 요인 또한 인쇄골목의 형성과 연관 있을 것이다. 인쇄골목에서 걸어서 십여 분 거리에 롯데백화점 광복점이 있는데, 이곳에는 한때 부산시청이 자리 잡고 있었다. 원도심이었던 이곳에 모인 관공서와 회사에서 발생한 인쇄 수요가 얼마나 많았을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땅값이 상승하는 원인이 되었다. 비싼 전세금 때문에 전전긍긍하던 인쇄소들이 주목한 곳이 바로 동광동이었다. 관공서, 회사가 밀집한 지역과 가까우면서도 전세가 저렴하다는 장점. 그렇게 인쇄소들이 동광동으로 하나둘 이전해오면서, 1970년대에는 출판 관련 업체들이 밀집한 ‘인쇄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한다. 이곳에서는 매일 디자인 기획과 인쇄, 코팅, 실사출력, 제본, 스크린 인쇄, 지업으로 분주하다. 골목 한 곳을 오가는 것만으로 인쇄와 관련된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해결할 수 있는 데다, 소비자가 원하는 다양하고 수준 높은 제품을 신속하게 제공받을 수 있으며, 가격도 타 지역에 비해 20% 이상 저렴하다고 한다. 아직도 부산과 인근 지역의 중·소상공인과 여러 회사가 동광동 인쇄골목을 즐겨 찾는 이유이다.
<동광동 인쇄골목> ⓒ무경
인쇄골목 입구 가게에서 본 ‘카렌다’라고 쓰인 간판처럼, 인쇄골목의 인쇄소에서 달력 제작은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이다. 한때는 집집마다 벽걸이 달력이나 탁상 달력을 걸어두곤 했으니, 그 수요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달력의 수요는 크게 줄었다. 홍보용 달력을 제작하는 업체도 줄어들었고, 미관을 목적으로 하는 디자인 달력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는 게 고작이다. 현재 인쇄소가 하는 또 다른 일은 명함 인쇄이다. 인쇄골목을 지나면 자연스레 가게마다 ‘명함’이라는 글자가 간판과 문, 창문에 붙어 있는 걸 볼 수 있다. 명함 역시 관공서와 기업의 수요가 큰 물건이다. 하지만 지금은 인터넷으로 주문 제작이 가능한 시대가 되면서, 동광동까지 와서 명함을 제작하는 수요는 예전보다 줄었다.
길을 걸으며 옛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골목 구석구석 인쇄소가 자리잡은 모습과 어디에 무슨 가게가 있는지를 알리는 간판 등은 내가 고등학생일 때와 비슷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렴풋한 기억 속 모습보다 확실히 한적했다. 당시에는 인쇄소 간판을 좀 더 많이 본 듯했고, 종이와 잉크 내음도 짙었던 것 같았다. 옛 기억을 가지고 걸어서일까. 평온하고 고요한 느낌이 조금은 아련하게 다가왔다. 실제로 동광동의 활력은 시대가 흐르면서 서서히 사라져 갔다. 인쇄골목에 위기가 온 건 1990년대 이후이다. 1998년 부산시청이 현재의 연산동으로 이전하면서 관공서에서 발생하던 수요가 줄어들었고, 컴퓨터와 프린터가 대중화되면서 개인이 필요한 내용을 쉽고 간편하게 인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전문 인쇄 외의 인쇄 물량 수요가 감소하면서 인쇄골목 또한 침체되어 갔다.
<동광동 인쇄골목> ⓒ무경
인쇄골목에는 인쇄 관련 업체만 자리한 게 아니다. 부산을 대표하는 출판사가 입주해 있고, 부속 관련 업종들 또한 몰려있다. 작가들이 들러 글쓰기의 노고를 달래는 찻집이나 술집 등의 가게 말이다. 골목 구석구석에서 오래된 식당과 카페, 술집을 찾을 수 있는 이유이다. 작가는 책에 실을 원고를 쓰는 일을 한다. 하지만 원고 집필은 책이 나오는 과정 전반부일 뿐이다. 책을 교정, 교열하고 난 뒤 인쇄하고 재단, 제본하는 과정이 남은 후반부 과정이다. 이 후반부 작업 중 책의 실물을 만들어 내는 모든 작업을 인쇄소에서 한다. 흰 종이에 검은 잉크로 글을 찍어내고, 인쇄된 종이를 재단하고, 그걸 하나로 묶어 제본하는 마지막 과정. 작가의 꿈과 열정이 종이와 잉크에 담겨 그렇게 한 권의 책으로 가공되는 것이다. 작가로서 동광동 인쇄골목, 넓게는 중구 지역은 무척 각별한 느낌이 있다. 이곳은 한국전쟁 당시 여러 예술가가 모여 예술 공동체로 활동한 지역이기도 하다. 이곳의 예술적인 움직임은 동광동에 인쇄골목이 들어서는 게 자연스럽도록 이끈 게 아닐까. 그래서인지 2010년대부터 공동화가 진행되는 이 지역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지역 사회의 다양한 노력 가운데 특히 문화예술계의 움직임이 눈에 띈다. 빈집을 예술인의 창작 공간으로 제공하거나 '골목길 콘서트', '거리 갤러리 미술제 공모전' 등의 행사를 개최하면서 문화공간으로의 전환을 꾀하였다. 지금도 부산에서는 여러 예술인이 이 지역 인근에서 활동하며 자신들의 꿈을 키워 나가고 있으며, 원도심 창작공간 운영지원센터 등을 통해 그들을 지원하고 있다. 또한 2012년에는 제2회 거리 갤러리 미술제가 열려 골목 벽면이나 계단에 그림을 그려 골목 여기저기를 더욱 밝고 생동감 있게 장식하기도 했다. 지금도 거리 곳곳에 산뜻한 색감의 벽화를 찾을 수 있다. 인쇄골목 여기저기를 걸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어떤 이는 이곳을 걸으며 한때의 번영이 무색하게 서서히 쇠락해 가는 낡은 것들의 냄새를 맡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동광동 인쇄골목은 예전처럼 분주한 이들로 가득하지 않다. 하지만 회색 골목을 걸으며 바다의 습기에 녹은 종이와 잉크 내음을 맡다 보면 골목 깊은 곳에 서린 힘을 느낄 수 있다. 골목 여기저기를 넘나들며 꿈틀거리는 냄새는 말한다. 이곳이 아직도 약동하고 있다는 것을. 고요함 속에 뜨겁고 짙은 열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아직도 여기가 활발하게 움직이며 종이에 부산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는 것을.
[ 2024년 부산미래유산 보존·활용체계 구축 용역 - 무경 작가 기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