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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여성 독립운동가 박차정의 삶과 생애(박차정 생가터)

부서명
문화유산과
전화번호
051-888-5094
작성자
박현경
작성일
2024-07-01
조회수
120
내용

동래에서 박차정을 찾다


부산의 중심은 어디인가? 이 질문을 던지면 부산 토박이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크게 갈릴 것이다. 지금 가장 번화한 해운대, 지리적 중심지이자 아직도 번화함을 자랑하는 서면, 구도심 지역이었던 남포동 등. 하지만 동래 사람들은 그들이 사는 지역인 동래야말로 부산의 중심이라고 당당하게 외친다. 그들의 자부심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동래 지역은 아직 오랜 역사의 흔적이 잘 보존되어 남아 있다. 이는 특히 일제강점기라는 엄혹한 시대를 맞으면서도 전통을 지켜오려 애써온 동래 사람들의 삶이 아직까지 이어져 오기 때문일 것이다. 한여름처럼 볕이 뜨거운 6월, 부산지하철 4호선 낙민역에 내렸다. 동래고등학교가 있고 충렬사와 동래시장, 동래부 관아가 있는 이 동네는 한때 지역의 중심지였고 사람들의 삶과 정신을 모으는 구심점이었을 것이다.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이 지역에서 나고 자란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보기 위해서이다. 박차정. 내가 찾으려는 이의 이름이다.


항일 여성 독립운동가 박차정


박차정의사 생가1

(박차정의사 생가) ⓒ무경


박차정이라는 이름은 한국 근현대사를 모르지는 않는다고 자부하던 내게도 생소한 이름이었다. 그 이름은 다른 이와 엮이면서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김원봉. 항일무장투쟁단체 의열단의 대장이었던 인물. 한때는 잊힌 인물이었다가, 여러 매체에서 재조명되며 다시 사람들에게 알려진 독립운동가. 박차정은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에 몸 담은 뒤 1931년 김원봉과 결혼한다. 이후 1938년 창설된 조선의용대에서 부녀 복무 단장이 되어 무장 투쟁을 벌이다가, 1944년 충칭에서 총상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박차정은 김원봉이라는 인물에 감화되어 그를 따라 애국 활동에 몸 담은 인물로 여겨지기 쉽다. 하지만 박차정의 독립운동 행적을 살펴보면, 중국행 이전에도 굵은 선을 긋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박차정은 1910년 5월 7일 경상남도 동래 복천동 417번지(현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 98번길 129-10, 칠산동 319-1)에서 3남 2녀의 넷째로 태어났다.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망국으로 나라를 잃는다. 박차정은 1929년 동래일신여학교를 졸업한 이후 근우회 동래지회 핵심 인물로 활동하다 두 차례 옥고를 치른다. 일제로부터의 감시를 벗어나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던 박차정은 1930년 오빠 박문희의 도움으로 중국으로 망명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의열단에 들어가고, 얼마 뒤 김원봉과 결혼한 것이다.


박차정의사 생가2

(박차정의사 생가) ⓒ무경


박차정의 행적을 온전히 짚어 보려면 가족들 또한 이야기해야 한다. 부친 박용한은 국권 피탈 후 일제 폭압에 저항하며 1918년 자결하였고, 모친 김맹련은 자식들을 뒷바라지하며 애국심을 일깨웠다. 형제 가운데 언니 박수정은 교육자로서 봉사하였으며, 동생 박문하는 동래에서 의료 사업에 종사하며 지역의 대표적 수필가로 활동했었다. 박차정의 두 오빠가 남긴 행적은 더욱 두드러진다. 첫째 오빠 박문희는 청년연맹과 신간회를 거쳐 의열단에서 활동한다. 둘째 오빠 박문호는 동래청년동맹 결성을 주도하였고 의열단에 몸담았다. 박차정의 애국심이 부모님과 가족들 사이에서 싹트고 성장했으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박차정 생가터의 입구 공터에는 박차정과 박문희, 박문호의 행적을 그린 표지와 세 명의 모습을 함께 담은 그림과 벽화 장식이 있다.


박차정 생가 복원과 건립


박차정의사 생가 가는 길

(박차정의사 생가 가는 길) ⓒ무경


내가 박차정 생가를 찾은 건 오후 1시였다. 낙민역 1번 출구로 나오면 동래고등학교 옆으로 들어가는 골목과 바로 만날 수 있다. 그곳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박차정 생가 앞에 금방 도착할 수 있다. 1번 출구 앞에서부터 여기저기에 ‘박차정 생가’라고 적힌 표지판이 있으니 안내를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박차정의사 생가 앞

(박차정의사 생가 앞) ⓒ무경


생가 앞에는 아담한 공터가 조성되어 있고, 박차정의 생애를 기록한 표지와 아기자기한 벽화가 보인다. 그곳에서 화살표의 안내를 따라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한옥 대문이 보인다. 박차정 생가의 문이다. 생가 관람 시간은 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며, 점심시간은 12시부터 1시까지이다. 나는 점심시간이 끝나자마자 찾아온 셈이다. 닫혀 있던 생가의 문은 금방 열렸다.


박차정의사 생가3

(박차정의사 생가 앞) ⓒ무경


박차정 생가는 그리 크지 않았고, 뜻밖에 아주 낡아 보이지도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현재 생가터에 지어진 집은 박차정이 태어난 집이 아니다. 1936년 여기에 새 건물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때 지어진 건물마저 거의 파손된 상태이던 1996년, 박차정의사숭모회에서 생가 복원 계획을 수립하고, 2005년 현재의 건물을 지어 개관하기에 이른다. 박차정이 청소년기를 보낸 원래의 집은 아니지만 박차정을 기릴 수 있는 장소로서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작은 집은 아담한 크기의 마당과 어우러져 한적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마당 한편에 심은 석류나무에 꽃이 한 송이 아담하게 피어 있었다. 나는 잠시 마당을 거닐며 이곳에 박차정의 가족들이 살았을 광경을 떠올려 보았다.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와 동생까지 일곱 명이 살았다면 마당은 지금처럼 조용하지 않고 왁자지껄한 생활감이 넘치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이 나온 집에서 뜻밖에 평범한 삶의 활기찬 움직임을 느꼈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여러 모습


박차정의사 생가4

(박차정의사 생가) ⓒ무경


생가를 지키는 분에게 건물 안으로 들어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안에는 박차정에 관한 여러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훈장과 기념패 등이 전시되어 있었고, 벽에는 박차정이 나온 정부나 공공기관의 포스터, 생애를 요약한 글들이 붙어 있었다. 전시물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박차정 동상. 박차정 동상은 현재 부산 금정구 구서동에 위치한 금정문화회관 옆 만남의 광장에 서 있다고 한다. 군복을 입고 총을 든 채 앞을 똑바로 바라보는 모습을 담은 동상은 우리가 여성 독립운동가라는 말을 듣고 흔히 연상하는 것과는 달랐다. 치마 저고리 차림으로 만세를 외치는 모습과는 다른, 무력으로 맞서 싸우는 진짜 군인의 모습이었다. 과거 여성 독립운동가는 집안을 돌보거나 독립운동가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것으로 그려지곤 했다. 하지만 여성 독립운동가 중에는 다양한 대외 활동을 하고, 심지어 직접 총을 들고 무장 투쟁에 뛰어든 이들 또한 있었다. 대한독립이라는 대의 앞에서 다를 것은 없었다. 나는 추리소설을 쓰면서 일제강점기에 실제로 있었을 다양한 군상을 그렸다. 그중에는 우리가 관념적으로 떠올리는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도, 혹은 그림에 그린 듯한 매국노도 있다. 하지만 당시를 살았던 이들은 훨씬 다양하고 역동적인 삶을 살았다. 박차정 생가에서는 사진으로만 남은 박차정 동상을 보면서, 언젠가 박차정 같은 여성 독립운동가의 좀 더 실제에 가까운 모습 또한 작품 속에 녹여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박차정은 여성 독립운동가로는 유관순에 이어 두 번째로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추서받았다. 하지만 박차정의 행적을 ‘여성’ 독립운동가라는 틀에 못 박으면 안 될 것이다. 박차정이 남긴 행적은 남자와 여자라는 성별을 뛰어넘어 다른 이와 쉬이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놀랍다.


동래와 부산의 정신, 박차정이라는 결실을 맺다


박차정의사 생가5

(박차정의사 생가) ⓒ무경


박차정의 극적인 삶을 더듬어 나가면서, 나는 그 뿌리에 동래 지역의 정신이 담겨 있지 않을까 추측해 보았다. 박차정은 1919년 3월 동래의 만세 운동도 어린 나이로 지켜보았을 것이다. 지역의 조선인들이 일본인의 지배하에서 자주적으로 활동하며 제 목소리를 내려는 것도 보았을 것이다. 학교를 다니면서 동래 사람들과 함께 독립운동에 나서려 노력했고, 옥고도 치렀다. 중국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활동하면서도, 그 정신은 온전히 태어나서 자란 곳에서 보고 듣고 겪은 것에 뿌리를 두고 있었을 것이다. 취재를 끝내며 마음이 차분해졌다. 억지스레 지어낸 비장한 결기가 아닌, ‘당연히 그러했을 것이다’라는 자연스러운 흐름을 느껴서였다. 박차정은 동래 지역을 대표할, 나아가 부산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분명했다. 박차정이 지녔던 뜨거운 혼의 뿌리는 바로 동래와 부산에 있었다. 부산의 뿌리가 맺은 결실 중 하나가 박차정이었다.


[ 2024년 부산미래유산 보존·활용체계 구축 용역 – 무경 작가 기고 ]